“십자가의 하나님과 바울: 왜 우리는 바울을 신뢰하면서도,
십자가의 렌즈로 바울을 ‘비판적으로 사랑’하며 읽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다. 칼을 든 자의 폭력보다 더 깊은 순종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 미움과 모욕 앞에서도 끝까지 보복하지 않으신 온유함,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인간의 죄와 상처를 품어내신 자비.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얼굴을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로 고백한다. 그러나 이 고백이 선명해질수록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 가지 복잡한 문제를 마주한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복음서 안에서 다양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비교적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신약 성경의 상당 부분, 교회 신학의 거대한 구조는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편지들 위에 세워져 있다. 더욱이 그 바울은 다른 제자들처럼 육신을 입은 예수를 직접 따라다닌 사람이 아니라, 자신만이 목격한 부활 주님의 환상적 만남을 통해 부름 받은 특이한 경우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들이 등장한다.
1:“예수는 공적·역사적 증언이 풍성한데, 바울의 출발은 너무 개인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어지는 더 어려운 질문:
2:“성경 전체를 ‘십자가의 렌즈’로 읽어야 한다면, 바울 서신도 그 렌즈로 다시 평가해야 하는가?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흔드는 일은 아닌가?”
이 두 질문은 사실 하나의 문제를 향하고 있다.
1. 바울을 어떻게 신뢰할 것인가?
2. 신뢰한다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 문제의 해답은, 맹목적 복종과 값싼 회의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1. “보물 때문에 밭 전체를 산다” — 예수를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과 바울을 받아들인다
예수께서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사람이 보물을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이야기다(마 13:44).
신앙의 구조도 이와 동일하다.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성경은 그 보물이 묻힌 밭이다.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도들의 기록, 곧 전체 성경이라는 밭을 사용하셨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예수를 신뢰하는가? 그렇다면, 그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사용된 성경의 전체 구조 속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손을 떼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바울을 단지 “불안정한 개인의 환각적 체험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남긴 편지들이 초대 공동체의 검증을 통과하여 정경이 되었고, 2,000년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신학의 중심 문서로 자리 잡았으며, 실제로 역사와 문명을 깊이 형성해 온 사실 전체에 대해 “결국 우리는 2,000년의 신앙과 역사 전체가 한 개인의 환각과 인간 집단의 착각이 기적처럼 맞물려 일어난 결과라고 믿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예수의 진실성과 십자가의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아들의 복음을 증언하게 할 통로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과정 속에 작동했다고 고백하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신앙적으로도 일관성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세계의 모든 세부를 미세하게 조종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아들의 복음을 증언하게 할 통로들을 세우는 일에서까지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성품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 생명을 주기까지 인간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신 분이, 정작 그 사랑을 전할 길을 마련하는 일에는 무관심하거나 방관적일 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라는 보물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보물이 묻혀 있는 성경이라는 밭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밭 전체를 사는” 복음적 태도이며,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2. 바울은 혼자 달리지 않았다 — 그는 사도적 공동체와 부활 전승 속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질문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 자신이 이러한 의문을 충분히 예상했고, 회피하지도 않았다.
1. 바울은 자신의 독특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때가 차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라 부르며 부름의 방식이 특이함을 스스로 인정한다. 또한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괴수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2.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복음을 검증받았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베드로·야고보·요한 등 “기둥 같은 자들”과 자신의 복음을 나누고 “내가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도록”확인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독자 노선을 걷지 않았고, 객관적 복음의 기준을 자기 바깥에서 찾았다.
3. 그는 부활 신앙의 전승 속에 자신을 위치시켰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하며, 예수의 죽음·장사·부활·현현의 내용을 이미 교회 안에서 전승된 공식적 고백으로 전한다.
즉 바울은 새로운 계시를 독점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음을 함께 전달하는 사도적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내가 본 그분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보고 듣고 만진 바로 그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기독교 전통이 바울의 편지를 정경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가 검증도 없이 독점적 계시를 주장한 개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부활 전승 속에서 공동체가 확인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인간’이다 — 이것이 오히려 복음의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바울의 글에는 성령의 영감과 함께 그의 분노, 감정, 문화적 한계도 드러난다.
어떤 이들을 향해 “개들”이라고 부르는 표현
논쟁 중 감정이 올라오는 듯한 문장들
시대적·문화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듯한 대목들
이런 구절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형제를 향해 ‘라가’라고 하는 것도 죄라고 하신 예수님과 바울의 거친 표현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두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다.
1. 무비판적 절대화
:“바울이 했으니 무조건 옳다.”
2. 전면적 폐기
:“바울도 화내고 욕하니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은 이 둘 사이의 세 번째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해석학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세계—흙과 땀, 피와 상처가 있는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폭력, 모욕, 분노 자체)이 곧 하나님의 성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몸을 보라. 그 몸에는 로마의 채찍과 가시관, 못자국, 군인들의 조롱과 사람들의 침 뱉음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와 폭력이지 하나님의 품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잔혹한 표면 아래에서, 우리는 그 폭력을 끝까지 견뎌 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바울의 편지도 이와 비슷하다. 그 안에는 성령이 주신 깊은 통찰과 함께, 한 인간의 성격과 감정, 시대적 한계가 그대로 묻어 있다. 이 ‘흠집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연약한 사람을 도구로 삼으셨다는, 곧 성육신적 계시 방식의 흔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을 읽을 때 이렇게 묻는다. “이 인간적 울퉁불퉁함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은 어떻게 빛나고 있는가?”
바울의 연약함은 그를 버려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모두가 동일한 은혜 아래 있음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된다.
4. 신약의 사도들도 ‘점진적으로’ 배웠다 — 바울 역시 그 여정에 있다
부활을 본 사도들이라 해서 하룻밤 사이에 완전한 신학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수년 동안 유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이방인과 식탁을 같이하지 않게 되고, 바울은 그를 공개적으로 책망한다(갈 2장).
이 사건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활을 본 사도들도 십자가의 급진적 사랑을 점진적으로 배워 갔다.”
바울의 서신은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한 인간과 여러 교회가 변해 가는 살아 있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을 읽는다는 것은 완성된 교리 요약집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배우고 변화되는 여정을 함께 걷는 것이다.
바울을 대할 때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
한 손으로 그의 사도적 권위와 통찰에 귀 기울이고,
다른 손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며,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보게 하시는지를 겸손히 분별해야 한다.
5. “본문 충실”과 “십자가 렌즈”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 둘은 서로를 지켜주는 동반자이다
십자가를 성경 해석의 중심 렌즈로 삼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사랑에 맞지 않으니, 내게 불편한 구절들은 다 버리겠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해석자가 마음먹은 대로 얼마든지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고무줄 같은 책’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본문 자체에 최대한 충실하려는 보수적 해석 원칙이다.
먼저 본문이 문맥·언어·장르 안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진지하게 듣는다.
비유는 비유로, 묵시는 묵시로, 서신은 서신으로 읽는다.
신약의 많은 “폭력 이미지”(심판 비유, 계시록 전쟁 묘사 등)는 장르를 바로 이해하면 실제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십자가 렌즈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렌즈가 주관주의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닻이다.
그래서 해석의 과정은 두 단계로 정리된다.
1. 본문 그대로를 가능한 한 성실하게 듣는다.
2. 그럼에도 십자가의 사랑과 본문 사이에 해소되지 않는 충돌이 남을 때, 그때 비로소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기준으로 한 신학적 재해석을 사용한다.
이것이 성령께 순종하는 해석학이다. 성령은 우리 느낌을 정당화하는 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기억나게 하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6. 바울을 신뢰한다는 것 — 그를 절대화하지 않고, 그와 함께 십자가 앞에 서는 것이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1. 바울을 신뢰할 수 있는가?
2. 그렇다면, 바울도 십자가 렌즈로 읽어야 하는가?
복음의 관점에서라면,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바울을 신뢰한다
예수의 진실성, 십자가와 부활의 실제성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세워진 사도 공동체와 그 속에 편입된 바울의 증언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는다.
바울의 서신은 성령 안에서 형성된 교회의 기억 속에 포함된 것이며,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증언을 받는다.
2) 그러나 우리는 바울을 예수보다 위에 두지 않는다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 2:2). 그는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예수를 기준으로 삼는다.
3) 그래서 우리는 바울 ‘위에’ 서지 않고, 바울 ‘옆에’ 선다
우리는 바울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그의 말을 듣는다. 그의 통찰은 예수께 더 깊이 인도하는 한에서 귀하다. 그의 연약함은 오늘 우리의 연약함을 비추는 거울이다.
4) 십자가 렌즈는 바울을 버리기 위한 칼날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해석을 비추는 칼날이다
십자가 앞에서 비판받는 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 우리의 해석, 우리의 전통, 우리의 편견이다.
십자가 렌즈는 “불편한 구절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배우는 방식”이다.
7. 결론: 바울을 통하여, 그러나 바울을 넘어서,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궁극적으로 우리가 신뢰하는 분은 바울이라는 인간 사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그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사랑을 전하시기 위해 상처 많은 인간들을 기꺼이 사용하셨다. 바울도 그중 하나이며, 그의 서신 안에는 성령의 빛과 인간의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든다.
1. 성경 전체, 그중 바울 서신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밭”이다.
우리는 이 밭을 통째로 받되, 예수를 중심으로 갈고 해석한다.
2. 바울을 읽을 때 우리는 맹목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않다. 성령이 열어 주시는 만큼, 바울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 필요하다면 그와 함께 회개하며 성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보수성은 어떤 인물이나 전통의 절대화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해석과 신학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태도다.
그리고 진정한 급진성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의 해석, 우리의 교리, 우리의 정치적·종교적 틀보다 단호히 앞세우는 용기다.
바울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를 예수 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서, 해석에서, 삶에서 조금 더 진실해질수록,
우리는 바울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바울을 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분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바울을 신뢰하는 것도, 바울을 넘어 해석의 모든 기준점을 다시 살펴보는 것도, 모두 한 분을 더 선명히 보기 위함이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분— 그 사랑의 얼굴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을 붙드는 이유이며, 모든 해석의 긴장과 질문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이고, 마침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신앙의 최종 지평이다.

“야훼께 한 가지 청합니다.
내가 그것만은 간절히 바랍니다.
한평생 야훼의 집에 살면서
야훼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르고
그의 성전에서 사색하는 일입니다.”
— 공동번역 성서 (시편 27편 4절)
“One thing I ask of the Lord, this alone do I seek: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contemplate in His sanctuary.”
— English contemplative rendering (ESV/NRS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