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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미워하시는가?
ㅡ"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피 흘렸다."


1. 이 질문은 감정 위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인가, 아니면 사람을 미워하시는가?”

이 질문을 다루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심리 상담이 아니다. 이 질문은 복음의 심장을 겨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결국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어떤 분인가?

그분은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구약에 나오는 분노, 저주, 증오의 언어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인가?

아니면, 상처 입은 인간이 자기 분노를 하나님께 투사한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존재인가, 아니면 혐오의 대상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실제로 우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언어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미워하십니다.” (시편 5:5)

“폭력을 사랑하는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 (시편 11:5)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내가 다시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겠다.” (호세아 9:15)


이 본문들을 표면 그대로만 읽으면 결론은 아주 간단해 보인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실 뿐 아니라, 죄인 그 자체를 혐오하신다. 하나님은 그 사람 자체를 싫어하신다.”


실제로 일부 설교자들은 이렇게 가르쳐 왔다.

“하나님은 죄인을 개인적으로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너는 하나님의 분노 대상이다.”


이 메시지가 사람의 영혼을 산 채로 꺾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말은 사실상 이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다. 하나님은 너를 본질적으로 적대하신다.”


그런데, 이 선언은 요한복음 3장 16절과 정면 충돌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여기서 “세상”은 경건하고 예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다.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서로를 찢는 바로 그 세상이다. 그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따라서 질문은 이렇게 예리해진다.

구약에 기록된 “미워한다”, “혐오한다”, “씨를 끊겠다”라는 언어는 정말 하나님의 내면 그대로의 심장을 투명하게 보여주는가?

아니면, 그 언어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기준은 “내가 듣기 불편하다 / 위로가 된다”가 아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다. 십자가다.


2. 십자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최종적으로 드러난 자리

왜 하필 십자가인가?

십자가는 단순한 신앙 상징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최종 계시다. 이것은 단순히 경건한 표현이 아니라, 해석의 원칙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1) 하나님의 행동: “나는 너를 위해 피 흘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우리의 죄, 수치, 저주를 짊어지셨다.
자신을 내어주셨다.
모욕을 당하는 순간에도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한다 (요한일서 4:8).
십자가는 그 문장을 피로 증명한 자리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술을 감정이 아니라 역사로, 관념이 아니라 살과 피로 못박는다.

즉,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마음은 너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하여 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2) 인간의 행동: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범죄자 취급한다.”

동시에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했는지를 폭로한다.

사람들은 예수께 침을 뱉었다.
조롱했다.
채찍질했다.
가시관을 씌웠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쓰레기다.”

여기서 보이는 폭력, 조롱, 잔혹함, 살의, 모욕, 정죄 ―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얼굴이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사실은 결정적이다.
십자가에는 두 겹의 계시가 동시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 “내가 너를 위해 피 흘린다. 나는 이렇게 사랑한다.”


*인간의 반응: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제거 대상, 처형 대상, 혐오 대상처럼 다룬다.”


따라서 십자가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곧 이 구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자기희생적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진짜 얼굴이다.

그 사랑을 짓밟는 폭력과 증오: 이것은 인간의 얼굴이다.


이제 이 기준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다시 읽어야 한다.


3. 구약의 거친 언어는 누구의 얼굴을 비추는가?

이 기준으로 구약을 다시 보자.

구약에는 거칠고 피비린내 나는 언어가 실제로 등장한다.

“원수의 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라.”

“씨를 말려버리겠다.”

“배를 갈라버리겠다.”

“나는 너희를 미워한다.”


이 언어는 누구의 얼굴과 더 닮아 있는가?

“내 몸을 찢어 너를 살리겠다.”라고 말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얼굴인가?

아니면 “저놈들을 갈가리 찢어 달라!”라고 절규하는 전쟁터의 상처 난 인간의 얼굴인가?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답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본심은 아들의 피 흘림이다. 하나님의 본심은 ‘너를 저주한다’가 아니라 ‘내가 대신 맞겠다’이다.”


즉, 하나님은 멀찍이 떨어져 돌을 던지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로 직접 내려오셔서 그 돌을 대신 맞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해석의 척도다.


4.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완제품”이 아니라 “사랑이 낮아진 기록”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만약 십자가가 하나님의 최종 계시라면, 성경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하늘에서 깨끗하게 떨어진 무균 교재처럼 다룰 수 없다.

성경은 차가운 돌판이 아니다.
성경은 사랑이 먼지 속으로 내려온 기록이다.

성경은 피 묻은 전장, 제국의 폭력, 짓밟힌 백성의 울음, 무너진 양심의 자리들 속으로 하나님이 몸을 던지신 여정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나 시편 기자나 사도들을 무감각한 받아쓰기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셨다.
그들의 언어, 그들의 분노, 그들의 문화적 편견, 그들의 복수 충동, 그들의 한계를 지워버리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안고, 그들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렇게 하신다.

“너의 언어가 거칠어도, 너의 신학이 덜 자라 있어도, 네 안에 복수심이 들끓고 있어도… 나는 거기까지 내려간다. 나는 그 자리에서 너와 말하겠다.”


그래서 성경에는 정말 이런 말이 기록된다.

“하나님이 저들을 미워하신다.”

“그들의 아이를 찢어버리겠다.”

“원수의 씨를 뿌리째 뽑아버리겠다.”


이 언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이건 고대 근동 전쟁 문화의 언어다.

“원수는 씨를 말려야 한다.”

“복수는 의롭다.”

“상대의 아이까지 끊어야 참된 평안이 온다.”


아내와 자식을 전쟁에서 빼앗긴 이스라엘의 상처받은 심장은 이 복수의 상상력을 그대로 기도 안에 쏟아낸다. 그 기도는 잔혹하다. 동시에, 정직하다. 그들은 진짜로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 고통의 언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 말을 “역겹다, 치워라”라고 거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자리로 내려오신다.
그 분노의 언어, 그 복수의 독이 둥둥 떠 있는 바로 그 언어 안으로, 스스로를 담으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렇게 행하신다.

“너의 복수 신학이 아직 유치해도, 나는 그릇째로 버리지 않겠다. 그 유치한 그릇 안으로 내가 들어가겠다. 거기서부터 너를 데려 나오겠다.”


이게 계시의 방식이다.

계시는 “조용히 해. 내가 절대 진리를 내려줄 테니 넌 입 다물고 받아 적어”라는 폭군식 하향 명령이 아니다.
계시는 사랑의 동행이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인간의 왜곡까지 짊어지신다.

그 결과, 성경 안에는 두 층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참된 마음: 자비, 긍휼, 회복시키려는 의지, 화해시키려는 사랑.

*인간의 투사: “하나님, 내 원수를 갈가리 찢어 주세요.” “하나님은 저 인간들을 혐오하셔. 나처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두 번째 층(인간의 투사)을 그냥 삭제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 자리조차,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를 만나주신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 패턴을 본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 겉으로 보면 “저주받은 범죄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 그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일하고 있었다.

구약에서도 때로 하나님은 잔혹한 전사신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실상, 그 묘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왜곡된 상상력까지 짊어지고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흔적이다.


겉모습은 잔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5. 성령의 방식: “돌파”와 “수용”

이제 이 질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왜 즉시, 단번에, 모든 폭력적 사고방식을 박살내지 않으셨는가?

여기서 성령의 방식이 드러난다. 성령은 역사 속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일하신다.

1. 돌파(breakthrough):
기존 문화를 앞지르는, 충격적으로 급진적인 사랑의 요구.


2. 수용(accommodation):
아직 준비되지 않은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않으시되, 그 구조 안으로 들어가 그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 주시는 것.



이 두 방식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둘 다 사랑이다.
둘 다 구원이다.


(1) 돌파의 예: “서로 복종하라.”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명령한다.

“서로 복종하라.”

“남편들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신 것 같이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


1세기 문화에서 남편은 사실상 절대자였다.
아내는 법적·사회적으로 종속된 지위였다.
“남편은 주인, 아내는 종”이라는 구조가 상식이었다.

그런데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 구조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겠다. 복종은 한 방향(아내→남편)이 아니다. ‘서로 복종하라.’ 남편도 복종하라.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방식으로. 너는 권력자가 아니라, 먼저 낮아지는 자다. 네 모델은 십자가다.”


이건 단순한 ‘가정의 화목’ 조언이 아니다.
이건 가부장 질서를 내부에서 폭파시키는 선언이다.

성령은 권력을 가진 쪽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너부터 내려와라.”

이것이 돌파다.
이것이 십자가의 논리이며, 복음의 윤리다.


(2) 수용의 예: “연약한 그릇.”

하지만 모든 본문이 같은 수준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다.

베드로전서 2–3장을 보라.

종(노예)들에게 “부당한 대우에도 순종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의 같은 어조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아내가 남편을 “주”라고 부르는 예시(사라와 아브라함)를 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여기서 “연약한 그릇”은 단순히 “평균 근력이 약하다” 정도의 말이 아니었다.

1세기 문화는 여성을 이렇게 보았다.

지적으로 더 약하다.

도덕적으로 더 쉽게 무너진다.

영적으로 더 쉽게 속는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하다.

따라서 보호되어야 하고, 사실상 관리되어야 한다.


즉, 여성은 존엄한 동역자라기보다는 소유물에 가까운 지위로 여겨졌다.

“연약한 그릇”이라는 말은 이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것을 우리는 곧바로 이렇게 등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 질서다.”


그건 아니다.
이건 성령께서 1세기 가부장 질서 한복판으로 들어가셔서, 그 한계 안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즉, 수용의 장면이다.

성령은 이렇게 하신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구조 안으로 들어가신다.

그 구조를 즉시 산산조각 내지 않으시면서도, 그 구조 안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조금씩 밀어 올리신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약 안에서조차 이런 긴장을 본다.

한쪽에서는 “서로 복종하라”는 선언을 통해, 권력자가 스스로를 낮추도록 요구하는 돌파가 일어난다.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아내는 복종하라…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다”라는 가부장적 언어가 남아 있는 수용이 나타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이것은 성장이다.
이것은 계시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자리에서 만나신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게 하신다.
그 자리에서 우리를 십자가 쪽으로, 부활의 생명 쪽으로, 성령의 자유 쪽으로 끌어가신다.

계시는 “압력”이 아니라 “동행”이다.
한 번에 내려꽂는 폭군의 법령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손붙잡고 걸어가는 사랑이다.


6.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은 죄인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이제 핵심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인을 미워하시는가?”


정답은, 십자가 앞에서만 제대로 들린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하나님은 죄인을 멀리 던지지 않으셨다.

오히려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죄인의 수치와 저주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죄인의 운명 ― 고립, 정죄, 절망, “너는 버려졌다”라는 낙인 ― 그것을 아들이 대신 짊어지셨다.


십자가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피 흘렸다.”


이것은 ‘분노의 신’이 아니다.
이것은 ‘스스로 찢겨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부활은 이 사랑이 감정적 동정이 아니라, 실제 승리임을 증언한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적으로 선언하시는 사건이다.

“예수의 자기희생적 사랑은 패배가 아니다.
인간의 폭력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
사랑이 마지막 단어다.”


부활하신 예수의 태도를 보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배반했으니 이제 심판을 받아라.”
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렇게 하셨다.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셨다. (요한복음 20장)

즉, 부활 이후 하나님의 첫 행동은 보복이 아니라 화해였다.
심판의 칼이 아니라, 평화의 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것을 교리로 요약한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겉모습과 현재의 실패만 보고) 알지 않는다.”


즉,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은 너를 미워하신다’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피 흘려 사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가치는 그의 현재 상태나 과오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가치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이미 결정되었다.

따라서 너는 그 사람을 “버려질 존재”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버리시는 대신, 그 사람 때문에 버려지셨기 때문이다.

복음은 위협이 아니다.
복음은 초청이다.

“너와 하나님 사이에 이미 화해의 길이 열렸다.
돌아오라.
이 사랑 안으로 걸어 들어오라.”


7. 죄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미움도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 오해를 끊어야 한다.

“그러면 죄는 별거 아니라고 말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십자가는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정반대로,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폭로한다.

죄는 실제 사람을 찢는다.
관계를 부순다.
자기 파괴적 중독과 폭력을 낳는다.
악령적 억압을 불러온다.

십자가는 죄의 잔혹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는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그 죄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린다.”가 아니라
“그 죄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해 피 흘린다.”


이 차이는 절대적이다.

“하나님은 너를 미워하신다.”라는 설교는 두 가지 독을 퍼뜨린다.


1. 절망

“나는 근본적으로 혐오의 대상이구나.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구나.”
이 절망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게 만든다.


2. 영적 교만

“하나님은 저 악한 자들을 미워하신다.
나는 사랑받는다.”
이 교만은 곧바로 종교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저 사람들을 짓밟아도 된다. 하나님도 미워하시니까.”


복음은 그 반대의 길을 연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도 네가 짓밟을 수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피로 산 존재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미움을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를 부순다.
복음은 인간의 폭력을 무장해제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 사람을 고발하는 검사나 재판관으로 부름받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 사람에게 화해를 권하는 사절로 부름받았다. (고린도후서 5장)

교회의 메시지는 이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너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 그러니 화해하라.”


8. 결론: 십자가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밝힌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1. 구약의 거친 언어 ―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씨를 끊겠다”, “배를 갈라버리겠다” ― 는 실제로 성경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삭제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역사적 기록이다. 성경은 살균된 종교 교재가 아니다. 성경은 피와 울음과 복수의 비명 속에서조차 하나님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 기록이다.


2. 그 언어의 많은 부분은 상처 입은 인간이 자기의 분노와 부족(部族)적 증오를 하나님께 들이대며 “하나님도 내 편이시다”라고 외친 목소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더러운 그릇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그 안에 자신을 담아주신다. 이것이 수용이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신 것과 같은 구조다.


3. 동시에 성경 안에는 이미 돌파가 시작되어 있다.

“서로 복종하라.”

“권력을 가진 네가 먼저 내려와라.”

“그를 더 이상 노예로 대하지 말고 형제로 받아들여라.”
이 선언들은 기존의 위계 구조를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폭탄이다.


4.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서야 하는가?
그 기준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종 자기계시다.
부활은 그 계시가 참되다는 하나님의 공적 선언이다.
성령은 그 계시를 지금 우리의 관계, 우리의 말투, 우리의 눈빛, 우리의 교회 구조, 우리의 부부 관계, 우리가 원수를 대하는 방식에 적용하신다.


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피 흘렸다.
너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너는 값으로 산 존재다.
네 가치는 네 실패나 네 과거가 아니라, 내가 흘린 피다.
그러니 너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보아라.
그 누구도 함부로 저주하지 마라.
그 누구도 ‘하나님이 너를 증오하신다’는 이름으로 버리지 마라.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위해 죽었다.”


이 선언은 부드러운 위로만이 아니다.
이 선언은 칼처럼 날카롭다.
왜냐하면 이 선언은 우리의 “정당한 증오”, 우리의 도덕적 우월감, “나는 의롭고 저 인간은 쓰레기”라는 종교적 자부심을 정면으로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네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내가 사랑했다.
네가 쓸모없다 여기는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피를 흘렸다.
네가 ‘하나님도 저 인간은 혐오하실 거야’라고 확신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나는 지금도 숨을 불어넣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한 거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너 같은 죄인을 미워하신다.”


그 문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무너진다.

십자가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나님은 죄인을 미워하신다”가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이다.

“너는 혐오의 대상이다”가 아니다.

“너는 피로 산 존재다”이다.

“나는 너를 정죄하러 왔다”가 아니다.

“나와 화해하자”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들고 나가야 할 유일한 메시지다.
이 메시지만이 사람을 진짜로 무릎 꿇게 한다.
공포 앞에 굴복시키는 굴욕이 아니라, 사랑 앞에서 무너지는 회개를 낳는다.
정죄의 고함이 아니라, 품어주는 손길 앞에서 터지는 회복을 낳는다.
협박이 아니라, 초청 앞에서 다시 살아나는 심장을 낳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십자가다.
이것이 부활이 증언하는 실제 승리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성령이 교회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은 단순하다.

너도 미워하지 말라.

너도 증오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하지 말라.

십자가는 네 증오를 지워버리는 불이다.

그 불은 파괴의 불이 아니라, 정화의 불이다.

그 불은 “너는 내 것”이라고 선언하는 사랑의 불이다.


그 불 앞에서, 우리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피 흘리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포로 굴복시키려는 폭군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아버지다.


따라서 그 앞에 선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을 정죄하는 재판관으로 살 수 없다.
그 앞에 선 우리는 이제, 화해의 사자로 산다.

이것이 복음의 윤리이며,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 앞에 증언해야 할, 하나님의 진짜 얼굴이다.
  • ?
    벚꽃향기 2025.10.30 01:26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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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2 출애굽기 17장의 십자가적 재독해 1 벚꽃향기 2025.10.13 110
4341 폭력의 본문 속에 숨은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서 1 벚꽃향기 2025.10.10 135
4340 악의 집착과 십자가의 최종 승리 2 벚꽃향기 2025.10.03 149
4339 사랑은 반드시 이긴다 1 벚꽃향기 2025.09.28 165
4338 하나님은 정말 고기 냄새에 기뻐하시는가? 1 벚꽃향기 2025.09.23 188
4337 피 묻은 본문을 꿰뚫는 십자가의 빛 2 벚꽃향기 2025.09.19 229
4336 문의드립니다. 지우123 2025.08.11 211
4335 자유를 위한 애매함 2 벚꽃향기 2025.08.08 277
4334 그 아이는 끝나지 않았다 – 십자가와 부활의 약속 3 벚꽃향기 2025.08.06 292
4333 Gpt에게 물어본 성경적인 관점에서 지옥이란? 1 행복해지기를 2025.08.05 220
4332 왜 막지 않으셨습니까? 1 벚꽃향기 2025.08.02 480
4331 의미는 만들지 않는다, 발견된다 2 벚꽃향기 2025.07.23 567
4330 칼을 든 신인가, 칼을 맞은 하나님인가 1 벚꽃향기 2025.07.21 560
4329 신은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못 박은 실재다 2 벚꽃향기 2025.07.19 520
4328 그냥 존재한다 vs 사랑이 존재케 했다 2 벚꽃향기 2025.07.18 637
4327 우주가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 없이 해석했던 것입니다 1 벚꽃향기 2025.07.16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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