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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7장 — 아간과 그의 가족의 죽음

7:1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야 할 것’을 훔쳐 범죄하였다.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갈미의 손자, 삽디의 아들 아간이 전리품을 숨겼고,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 전체 위에 불같이 타올랐다.

7:11–12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
내 명령을 어기고 온전히 바친 것들을 훔쳐 숨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원수에게 패한다.
너희 가운데 그 바친 것을 멸하지 않는 한,
나는 다시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7:24–25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아간과 그의 자녀들, 그의 가축들, 그의 장막과 모든 소유를 모아
악골 골짜기로 데리고 갔다.

여호수아가 말했다.
“너는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왔다.
여호와께서 오늘 너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 죽였다.
그들을 불에 태워 버렸다.
그 위에 큰 돌무더기가 쌓였고,
그 돌무더기는 오늘까지 남아 있다.


---

여호수아 8장 — 아이성 함락과 전멸(헤렘)

8:2
“너는 아이와 그 왕을 예전처럼 진멸하라.
오직 전리품과 가축은 이번에는 너희가 취하라.
매복을 두어 성 뒤를 치라.”

8:14–17
아이 왕과 모든 전사들은
이스라엘이 도망하는 것처럼 보이자 모두 성에서 나와 이스라엘을 추격했다.
그래서 성 안에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8:18–20
그때 매복한 이스라엘 병사들이
연기처럼 치솟는 불길을 보며 성으로 뛰어들어
성 전체에 불을 질렀다.

아이의 전사들은 뒤를 돌아보고
온 성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으나
도망갈 길이 없었다.

8:24–26
그날 아이의 모든 주민이
들에서도, 성 안에서도 칼날에 쓰러졌다.
그 수는 남녀를 합해 12,000명이었다.

여호수아는
모든 사람을 완전히 ‘바친 것’으로 죽일 때까지
자신의 손에서 창을 내리지 않았다.

8:28–29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영원한 폐허, 아무도 살지 않는 땅으로 만들었다.
그 왕은 나무에 매달려 죽었고,
해 질 때까지 시신은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 밑에도 큰 돌무더기가 쌓였는데,
그 돌무더기 역시 오늘까지 남아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호수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십자가의 하나님
—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본문을 통해서도 복음을 드러내시는가


1. “이게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일인가?” – 여호수아 7–8장의 충격

여호수아 7–8장은,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읽어주기에는 거의 잔혹 동화에 가까운 본문입니다. 아간이 전리품을 훔친 죄로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고 불에 태워지고, 이어지는 아이성 전투에서는 매복 작전으로 남자 전사들이 도륙됩니다. 마지막에는 아무 방비도 하지 못하는 성 안의 여자와 아이들까지 모두 학살당한 뒤, 성 전체가 불태워집니다(수 8:24–26).

게다가 성경은 이 모든 작전을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셨다”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폭력적이고 난해한 본문을 가리켜 누군가는 “여기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정직한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깊은 신학적·윤리적 물음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결국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도무지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솔직한 고백에서 출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두 길 중 하나를 가게 됩니다.


1. 십자가를 희석시키고 – 예수님의 온유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랑보다 구약의 폭력적 묘사를 “더 최종적인 하나님의 계시”처럼 올려놓거나,

2. 성경을 버리거나 – “이런 책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준 책이냐?”며 아예 성경 전체를 신뢰할 수 없는 문서로 취급하거나.


그러나 복음은 이 둘 중 어느 길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성경을 버리라고도, 폭력 텍스트를 하나님 성품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자체가 성경을 읽는 ‘해석의 창’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2. 하나님을 보려면, 먼저 십자가를 보라 – 계시의 최종 초점

신약은 한 목소리로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최종적으로, 결정적으로 드러내신 방식은 전쟁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옛적에는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1–2).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 1:15).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하나님의 최종적 자기소개는 여호수아의 칼과 창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폭력을 행사하여 원수를 죽이는 분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시며 원수를 위해 죽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성경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보려고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이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이 본문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얼굴을 기준으로 읽으면 무엇이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고, 무엇이 인간의 죄와 왜곡인가?”

이 질문 없이 “성경에 쓰였으니 다 똑같은 수준의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스스로 주장하는 계시의 중심 구조(예수 그리스도, 그 중에서도 십자가와 부활)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에서 배운 해석법 
– 겉(표면)과 속(깊이)

십자가 자체를 한 번 정직하게 바라보십시오.

겉으로 보이는 십자가의 표면은 끔찍하게 추합니다.
거기에는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음모,
제국 권력의 폭력,
제자들의 배신과 도망,
군인들의 조롱과 잔혹함,

인간의 죄와 추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연인의 눈으로 표면만 본다면, 십자가는 “신성 모독, 실패, 저주”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이 추한 표면을 “뚫어보면”
전혀 다른 현실이 드러납니다.

그 추한 장면 한가운데에 하나님 자신이 몸을 두고 서 계십니다.
사람들의 폭력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그 폭력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십니다.
그 폭력을 사탄과 죄의 세력을 향한 결정적 승리의 통로로 바꾸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는 기도 속에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의 정점이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표면은 인간의 죄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깊이에는, 죄인과 원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자기비움과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읽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로다”(요 5:39)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예수께서는 “모든 성경이 나(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영광을 받는 인자)에 관한 증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폭력적 본문조차,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뀝니다.

“어떻게 여호수아 7–8장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십자가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가?”


4.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와, 그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폭력을 휘둘러 사람을 밀어붙이는 분이 아니라,
자유를 존중하며 설득하고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계시의 모양도 달라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마 5:8).
“경건한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께서 [사특]하게 보이시리이다”(시 18:25–26).
“그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도다”(호 4:1).
“선지자와 제사장은 다 사특한 자라… 내 백성은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렘 2–5장 전체 맥락).

즉, 하나님은 늘 자신을 선하게 드러내시지만,
인간의 마음이 왜곡되어 있을수록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자신의 욕망과 폭력적 상상으로 뒤틀어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기적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검을 휘두르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요 18:10).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아마 “로마와 싸우기 위해 목숨을 걸라는 뜻이겠지”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잡혀 고난받고 죽을 것이다”라고 예고하셨을 때,
그는 “그리 마옵소서”라며 그 예언 자체를 거부했습니다(마 16:22–23).

만약 베드로가 그 시점에서 일기를 썼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메시아의 의도”를 잔뜩 왜곡한 해석을 읽게 되었을 것입니다.
곁에서 직접 예수님을 보았던 제자조차 이 정도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살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
그중에서도 전쟁과 보복이 일상화된 시대의 군인과 지도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그 때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하지 않았고, 백성의 마음은 아직 폭력과 보복과 민족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이런 상태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억지로 “강제 주입”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 그들의 왜곡된 틀 안으로 내려오셔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 결과, 성경에는

– 때로는 하나님의 참모습이 반짝 드러나는 아름다운 계시(호 11장, 사 53장 등)와
– 때로는 인간의 왜곡된 하나님 이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추한 초상들(여호수아의 대학살, 사무엘상 15장 등)이 함께 기록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성경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둘은 동일한 수준의 계시가 아닙니다.
이 둘을 구분해 내는 기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5. 여호수아 7–8장 다시 보기 
– “하나님이 잔인하시다” vs “하나님이 여기까지 내려오셨다”

이제 여호수아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죄를 지은 아간과 그의 가족이 돌에 맞고 불에 탑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매복 작전으로 적군을 유인하고,
성 안에 남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철저히 학살합니다.

이는 당시 고대 근동 전쟁 문화에서 “완전 파괴(헤렘)”라는 개념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이름으로 완전 몰살을 정당화하는 방식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본래부터 이렇게 폭력적이신 분이다.
우리는 그저 입 다물고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이
이 그림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마 5:44),
칼을 쥔 제자에게 “칼을 집에 넣으라”고 말씀하시고(마 26:52),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입니다(눅 23:34).

이 십자가의 하나님과,
여호수아서에서 대학살을 명령하는 “여호와”의 이미지 사이에는
분명한 긴장과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배운 해석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표면에 드러난 폭력과 잔혹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하고 계신’ 인간의 죄와 왜곡을 보여준다.

여호수아 7–8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이 믿고 있던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믿음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는 대신,
폭력과 보복에 물든 그들의 의식 속으로 자신을 감추어 들어가
‘당신이 바로 그런 신이라고 오해받는 것’조차 감수하시며
그들을 인도해 가셨다.”

즉, 이 본문은
하나님이 원래부터 잔인한 전쟁 계획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낮은 자리까지 내려와
이런 잔혹한 오해를 스스로 짊어지고 계신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죄인들의 자리에 서시고, 저주의 자리에 서시고, 범죄자처럼 오해받는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과 똑같은 패턴이
이미 구약의 폭력 본문 속에서 예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7–8장도, 결국 이렇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은 이 정도로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끔찍하게 오해하고 있는 그 자리 안으로까지 들어오셔서,
우리의 왜곡을 스스로 뒤집어쓰시면서도
언약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 곁에 머무르신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의 폭력 장면은
그 자체로 “본받을 모델”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하신 인간의 죄의 깊이를 폭로하는 거울로 읽히게 됩니다.


6. 베드로와 이스라엘, 그리고 우리 – “그래서 희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끔찍한 오해를 감수하시면서까지 이스라엘과 동행하셨을까요?
왜 베드로처럼 끝까지 오해하는 제자와 함께 걸으셨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억지로 상대의 머릿속을 뜯어고치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머물면서, 때로는 오해를 뒤집어쓰면서,
천천히 설득하고 변화시키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3년을 보냈던 제자들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무너지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십니다(요 21장).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와 “내 양을 먹이라”고 다시 부르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길을 잃은 두 제자와 엠마오 길을 함께 걸으십니다.

구약의 폭력 본문을 새롭게 읽는다는 것은,
단지 “텍스트 해석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오해와 폭력성까지 감수하시는 분인가를 바라보는 영적 눈을 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왜곡된 메시아 기대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와 당신의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
우리의 자기의, 두려움, 보복심, 종교적 교만 속으로도 들어오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폭력적 하나님 이해와 베드로의 오해 속으로까지
자신을 낮추어 들어가셔서 함께 걸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희망이 있습니다.

“이 정도까지 내려오시는 하나님이라면,
나 같은 사람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겠구나.”


7. 결론 – 피 묻은 여호수아에서, 피 흘리신 예수께로

여호수아 7–8장은 결코 “그대로 본받아야 할 신앙 영웅담”이 아닙니다.
이 본문을 십자가 없이 읽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폭력의 신으로 만들고,
‘하나님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을 정당화할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배운 눈으로 이 본문을 다시 보면,
이 장면은 이렇게 바뀝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
“하나님을 끔찍하게 오해한 인간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동시에, 그런 오해와 폭력성 속으로도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어 들어오셔서,
그 모든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폭력과 왜곡을 보고도,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네가 나를 오해하는 그 자리 안으로까지 내려와,
너를 설득하고, 깨우고, 새롭게 한다.
나를 보려거든,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에 달린 내 아들을 보아라.”

여호수아의 피 묻은 칼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함께 이 고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얼굴을 먼저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폭력의 이름으로 끌어다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따라 나 자신과 세상의 폭력을 직면하는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그때 비로소,
여호수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조차
복음의 빛 아래에서 다시 읽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 ?
    벚꽃향기 2025.11.26 02:55
    히브리서 12:2 (새번역, 개정판)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내다보시고,
    수치를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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