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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16–18)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현실, 실패, 한계 앞에서 마음은 말합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그러나 믿음은 묻습니다.

보이는 현실을 보는가,

아니면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이미 결정된 보이지 않는 결말을 보는가.

보이는 것은 크지만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조용하지만 영원합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이 아니라,

현실을 규정하는 기준을 바꾸는 선택입니다.

이제, 이미 끝난 결말을 향해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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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끝난 결말 속을 걷는 사람들

1. 이미 끝난 이야기 속을 사는 사람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붙들고 있는 가장 놀라운 진실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사실입니다(엡 2:6).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죄와 약점, 상처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복음은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너희의 결말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에서 끝났다.

너희의 신분은 이미 확정되었다.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다.”

이것은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희망 섞인 예측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삼으셨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엡 1:3–4).

우리는 겨우 구석에 간신히 끼어 들어간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자녀, 공동 상속자, 함께 다스릴 자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과 경험이 이 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에 우리의 존재를 다시 맞추라고 요청합니다.

2. “그것이 곧 우리다” – 이름이 아니라 실체인 자녀 됨

사도 요한은 이 놀라운 현실을 이렇게 압축해서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보라.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다”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그러하도다(That is what we are!)” 라고 못 박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녀답게 생각하지 못하고, 자녀답게 느끼지도 못하며, 자녀답지 않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신분을 보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감정: “나는 자격이 없어. 이렇게 망가졌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지?”

하나님의 선언: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내 아들, 내 딸이다. 그것이 곧 너다.”

복음의 급진성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졌기 때문에 자녀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라 먼저 불러 주심으로써 우리의 삶을 그 이름에 맞게 빚어 가십니다.

자녀 됨은 우리 쪽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만든 신분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신분이 단지 ‘법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임하십니다.

3. 신음하는 피조물, 이미 정해진 결말

놀라운 것은 이 ‘이미 이루어진 구속’이 우리 개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온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롬 8:19),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21)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으며,

전쟁과 기후 위기, 구조적 악이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세상의 결말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에서 결정되었다.

사랑이 마지막에 이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자녀들이 드러나면,

피조물 역시 그 자유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장면을 보지 못했을 뿐,

하나님 쪽에서는 구속의 핵심이 이미 완결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을 온 피조세계가 함께 공유하게 되는 날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적인 순종과 사랑의 선택이

단지 개인 윤리를 넘어, 우주적 이야기에 연결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따라 살기 시작할 때,

피조세계 전체가 기다려 온 “자유의 서막”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4.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 두 세계를 동시에 사는 법

문제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싸우고, 상처를 안고 있고, 관계는 수시로 깨지고, 몸은 늙어 가고, 죽음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정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가?

정말 나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인가?

정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성경은 이 긴장을 숨기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미”(already),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not yet)을 동시에 말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우리의 신분과 결말은 확정되었습니다.

아직: 그 신분이 우리의 생각·감정·습관·몸·역사 전체 속에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이미 끝난 결말을 향해 살아가는, 중간 장면”과 같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이미 마지막 장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마지막 장이 완전히 펼쳐지기 전의 페이지들 위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긴장 속에서 신자는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듭니다.

1. 눈에 보이는 실패와 죄, 약점에 정직해지되,

2.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 전체를 규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넘어졌다는 이유로

“나는 결국 이런 사람일 뿐”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규정할 권리는 이미 십자가와 부활의 주인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5. ‘마음의 눈’을 여시는 성령 –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이미/아직’의 긴장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부족함, 실패, 상처, 죄의 흔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마음의 눈”을 열어, 보이지 않는 차원의 진실, 곧

우리가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우리가 어떤 영광스러운 유업을 소유한 자인지,

우리 안에 어떤 능력이 이미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성령은 단지 감정을 달래는 위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진실을 현재의 우리 안으로 끌고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죄책감에 짓눌려 있을 때, 성령은 십자가에서 이미 선고된 “용서의 판결”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때, 성령은 “너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 포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대한 악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때, 성령은 “결말은 이미 정해졌고, 너의 작은 순종이 그 결말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포함된다”고 일깨워 주십니다.

믿음이란, 이런 성령의 조명에 동의하는 행위입니다.

보이지 않는 진실에 자기 삶을 다시 정렬하는, 조용하지만 급진적인 결단입니다.

6. 그분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을 닮는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성화되고 성장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장래에 우리가 어떻게 될지 온전히 모른다”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의 상상력, 신학, 언어는 그 장엄한 실체를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도적인 확신으로 선포됩니다.

“그를 볼 때, 우리는 그와 같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겸손, 온유, 거룩을 흐릿하게나마 바라보며 살 때에도

이미 우리는 조금씩 그분을 닮아 갑니다.

하물며 “그를 그 본래 모습 그대로 보게 될 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왜곡과 두려움과 어둠이

그분의 빛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복음이 주는 확신은 “언젠가 우리가 겨우 구원 받을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닮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의 의지나 성취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의 프로젝트에 근거합니다.

7. 오늘, 어디에 눈을 고정할 것인가

결국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우리의 상처와 실패, 반복되는 죄의 습관,

무너진 관계, 불안한 미래,

시대를 짓누르는 거대한 악과 불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이것만 바라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선택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그분의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이미 심판받았고,

정죄의 화살은 더 이상 우리를 향할 수 없음을 봅니다.

그분의 부활을 볼 때,

우리는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

패배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승리의 문으로 바뀐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십자가와 부활의 진실을

오늘 우리의 마음 안에서 “현재형”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전히 죄와 싸우고,

여전히 연약함을 안고 있고,

여전히 세상은 완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현실 한가운데서 이미 끝난 결말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에 근거한 낙관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결정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8. 이미 주어진 승리 안에서 오늘을 산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것은 단지 교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구속의 현실을 붙드는 것은,

오늘 우리의 선택 하나하나를 바꾸는 실질적인 능력입니다.

“나는 어차피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 대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선택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안 변해”라는 냉소 대신,

“결말은 이미 사랑의 승리로 정해졌다”는 확신을 붙들 때,

우리는 불의한 구조 앞에서도 침묵 대신 작은 순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 같아”라는 감정 대신,

십자가에서 드러난 결코 철회되지 않을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예수의 형상을 끝까지 빚어 내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너의 결말은 이미 내 사랑 안에서 결정되었다”라고,

십자가와 부활의 언어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단순합니다.

눈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

이미 끝난 결말을 믿음으로 앞당겨 살아가는 것,

성령께서 열어 주시는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진실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불안한 가능성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미 완성된

사랑의 승리를 향해 열려 있는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를, 그리고 이 피조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 안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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