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 사고로 죽을 수도 있었나?
1. 엉뚱한 상상
혹시 이런 이상한 상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아직 공생애도 시작하기 전, 목수로 일하시던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하늘을 날던 새 한 마리가 배설을 떨어뜨립니다. 그 배설물이 마침 지나가던 마차를 모는 사람의 눈에 들어갑니다. 놀란 마부가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마차가 미끄러져 돌진합니다. 그리고 그 전차가 예수님을 그대로 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십자가도, 골고다도, 공생애도 아무것도 시작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겉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상상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질문은 복음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겨눕니다. 이 한 장면 속에는 적어도 세 갈래의 중대한 물음이 겹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는가?
하나님은 역사를 어떻게 인도하시며 어느 정도로 개입하시는가?
십자가 죽음은 단지 비극적 사고인가, 아니면 사랑의 의지로 완성된 사건인가?
2. 십자가는 ‘사고사’가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사건’이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결코 “우연한 비극”이나 “통제 불능의 사고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설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도, 순종, 자기 내어줌의 언어로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규정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목숨을 버리노라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사도행전도 동일한 긴장을 붙듭니다.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주신 것인데, 너희가 …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니라”(행 2:23).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죄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뜻을 정하셨고”, 인간은 그 뜻을 짓밟는 방식으로 “죄를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이 바뀝니다. “예수님이 정말 ‘새똥-마차 사고’ 같은 우발적 사건으로 죽었다면, 그 죽음은 여전히 ‘나를 위한 자기 내어줌’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복음의 언어로 말하면, 십자가는 단지 “죽었다”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어떻게’ 죽었는가가 복음의 핵심이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히 닥친 죽음이 아니라, “잔”과 “때”와 “길”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순종하신 죽음입니다(마 26:39; 눅 22:42). 다시 말해, 십자가는 비극의 수동태가 아니라 사랑의 능동태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선언은, 사고의 결말이 아니라 사명의 완성입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적 상태’였는가
여기서 흔히 생기는 오해가 있습니다. “십자가 전까지 예수님이 어떤 우발적 죽음도 당하지 않도록 ‘반드시’ 지켜졌다면, 그분은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 사실상 손상 불가능한 존재였던 것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신비화하여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예수님이 진짜 인간이셨음을 반복해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배고프셨고, 피곤하셨고, 눈물을 흘리셨고(요 11:35), 심장이 눌리는 깊은 압박 속에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실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마 26:38). 히브리서는 더 날카롭게 말합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이 말은 예수님의 몸과 마음이 “연기”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상처를 입을 수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육체를 지닌 분이셨습니다(히 2:14).
따라서 물리적으로만 말하면, 예수님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칼에 찔려 죽을 수도 있고, 마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는 ‘죽을 수 있는 몸’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이 “참 인간”의 무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연약한 인간 예수께서, 자발적 사랑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복음은 그 둘을 동시에 붙듭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이셨고, 동시에 그 연약함 속에서 구원의 목적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4. 보호는 인간성을 지우지 않는다
그러면 이렇게 이어집니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떤 우발적 죽음에서 보호하셨다면, 그 보호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훼손한 것 아닌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보호’라는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보호를 “방탄막”으로 상상하면, 보호는 곧 인간성의 삭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보호는 대개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사건들의 경로를 꺾고 늦추고 비켜가게 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언어를 씁니다. “한 걸음만 늦었어도 큰 사고였는데 천운이었다.” “그 순간 전화가 와서 길을 바꿨는데, 나중에 보니 그 길에서 사고가 났다.” 이런 말은 우리가 갑자기 강철로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다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치고 죽을 수 있는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연약함을 지우지 않은 채, 아버지는 구원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섭리로 길을 여셨습니다. 보호는 인간성을 부정하는 장치가 아니라, 사명의 완성을 향해 열리는 길입니다.
5.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관통하는 신비한 표현이 반복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요 7:30; 8:20). 예수님은 절벽 아래로 밀려 죽을 뻔한 순간에도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 4:29–30)고 기록됩니다.
이 “때”는 단순한 운명론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무르익는 순간, 곧 사랑의 목적이 역사 속에서 특정한 모양을 취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바울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라고 말합니다. 즉, 십자가는 아무 때나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구원의 드라마가 성숙하여 도달하는 카이로스입니다. 요한복음은 마침내 “때가 이르렀다”는 선언을 분명히 합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이제 내 마음이 괴로우니 …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그리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구절은, 십자가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완결임을 못 박습니다(요 13:1).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균형을 봅니다. 예수님은 실제 위협 속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위협은 “때”가 오기 전에는 예수님의 사명을 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슈퍼히어로였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우연에 의해 파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6. ‘새똥–마차 사고’는 가능했을까
이제 처음의 상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새 한 마리의 배설, 마부의 눈, 놀란 말, 미끄러지는 마차,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물리적 가능성만 놓고 보면, 이런 연쇄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우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제로 그런 우연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질문은 이렇게 변합니다.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중심 사건을, 새 한 마리의 실수에 좌우되게 하시는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그렇게 허술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연과 자유가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도, 구원의 목적을 향해 역사를 이끄십니다. 이 확신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성경의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사람들의 악의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은 그 악을 넘어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창 50:20의 원리가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사도행전도 같은 결론을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 공모했고, 권력은 그 공모를 실행했지만, 그 사건은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사용되었습니다(행 2:23; 행 4:27–28).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막으셨는가. 성경은 그 “기술적 메커니즘”을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길을 여시고 닫으시며, 사람들의 의도와 상황의 흐름을 조정하시며, 때를 성숙하게 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없게 하실 수도 있고, 마부의 시선을 비껴가게 하실 수도 있고, 말이 놀라지 않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다만 복음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구원의 핵심이 “우연의 도박”으로 무너질 수 있었다면, 십자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계시가 아니라 “불운이 비켜간 행운”이 되고 맙니다. 복음은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새똥이 지배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랑이 완성되는 사건입니다.
7. 보호가 멈추는 날
여기서 더 결정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눅 22:42). 이 기도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가장 여실히 드러냅니다.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간구는 실제 고통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정직함입니다. 동시에 “아버지의 원대로”는 사랑의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직후, 흐름이 바뀝니다. 이전까지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막아지던 손들이, 이제는 붙잡습니다. 군병이 오고, 거짓 증언이 일어나고, 권력의 계산이 굴러가고, 십자가 형이 집행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통제력을 잃어버린 비극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이 말하는 충격은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통제 불능”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통제를 내려놓으신”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목숨은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신 것입니다(요 10:17–18). 하나님은 아들을 강제로 희생시키는 폭군이 아니라, 아들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그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보호막이 우연히 뚫린 불상사가 아니라, 보호를 거두어 사랑이 완성되게 하신 순간입니다.
8. “참 인간”과 “참 순종”이 만나는 자리
이제 처음 질문을 더 정확히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 사고로 죽을 “물리적 가능성”이 있었는가?
예, 그분은 참 인간이셨기에 가능성은 실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의 중심을 우연에 맡기셨는가?
아니오, 복음서가 반복하는 “때”의 신학은 그 가능성이 구원의 역사를 파기하는 방식으로 현실화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섭리로 이끄셨음을 보여 줍니다(요 7:30; 8:20).
바로 이 지점에서 십자가의 본질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었다면, 어떤 방식의 죽음이든 결과만 죽음이면 충분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를 그런 추상화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가 죽었다”가 아니라, “그가 끝까지 사랑하셨고(요 13:1), 끝까지 순종하셨고(빌 2:7–8), 원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건입니다(롬 5:8의 논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연히 죽어준 죽음’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랑을 선택한 죽음’입니다. 이 차이를 흐리면 복음이 무너집니다. 복음은 피할 수 없었던 사고를 미화하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의 자유를 선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9. 우연과 사고 속을 걷는 우리에게 스며드는 복음
이제 이 질문을 우리의 삶으로 가져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새똥 같은 사소한 우연’과 ‘마차 같은 거친 위험’ 사이를 걸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두려움이 마음을 덮습니다. “혹시 한 번의 우연이 내 삶 전체를 망가뜨리는 건 아닐까? 하나님이 내 삶에 두신 뜻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건 아닐까?”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 두려움을 향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목적을 우연에 맡기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유리벽 안에 넣어 무균 상태로 보존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다치고, 잃고, 울고, 흔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 흔들림의 세계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은 고통을 삭제하는 마법 주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목적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도록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더 깊은 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사고에서 면제”시키는 분이 아니라, 때로는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의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보호가 거두어진” 자리에서 사랑을 완성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언젠가 사랑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복음은 말합니다. 십자가는 ‘내가 안전해지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나도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부르심으로 이어진다고.
10. 마지막 정리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 사고로 죽을 수도 있었나?”라는 질문이 우리를 데려가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셨기에 상처받고 죽을 수 있는 몸을 지니셨다(히 2:14–18; 히 4:15). 그러나 십자가는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신 자발적 사랑의 사건이다(막 10:45; 요 10:17–18; 요 13:1). 하나님은 “때”를 통해 구원의 목적이 우연에 의해 파기되지 않도록 섭리로 이끄셨고(요 7:30; 8:20; 갈 4:4), 마침내 그 “때”에 이르러 보호를 거두어 사랑이 완성되게 하셨다(마 26:39; 요 19:30).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우연에 휘둘리지 않지만, 그 계획의 중심에는 억지가 아니라 사랑의 자유가 있다.
그래서 이 질문은 결국 우리를 한 고백으로 데려갑니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 연약함을 입고 이 땅을 걸으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오늘도 살아간다. 우연과 위험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 사랑을 따라 누군가를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로 부름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