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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8 06:34

참 하나님, 참 인간

조회 수 1122 추천 수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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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

​

우주의 창조주가 떨리는 인간의 숨을 쉬며, 시간과 역사 한가운데

‘예수’라는 이름으로 서 계신다.

​

이제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는 이 한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복음이 사랑의 역설 안에서 살아날지, 논리의 모순 속에서 무너질지를 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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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하나님, 참 인간

– 모순이 아닌 사랑의 역설​

​

​

(1) 역설을 피하면, 복음의 심장을 잃는다​

​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가장 난해한 한 문장이 서 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시다.”​

​

많은 이들은 이 고백을 듣는 순간 이렇게 반응한다.

​

“말은 아름답지만… 이건 사실상 ‘논리적 모순’ 아닌가?”​

​

만약 이것이 정말 “모순”이라면, 기독교 신앙 전체는 모래 위에 세운 건물에 불과하다.

​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다”(요일 4:8, 16)라고 말할 근거를 잃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이상 그 사랑의 깊이로 알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보다 더 작게, 더 얕게 이해되고 만다.

​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성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요구한다.

​

“하나님이 진리이시라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우리의 언어는 최소한 모순은 아니어야 한다.”​

​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역설(paradox)”과 “모순(contradiction)”을 구분하지 못하면, 성육신을 오해하게 된다.

​

빛은 실험 조건에 따라 파동처럼(간섭·회절 같은 연속적 패턴)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조건에서는 입자처럼(에너지가 ‘묶음’으로 검출되는 광자) 보이기도 한다고 물리학은 말한다. 우리는 이것이 한 번에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 직관적으로 “양립 불가”처럼 느끼기 쉽다.

​

그러나 엄밀히 말해 “파동”이라는 말 속에 “따라서 입자일 수 없다”라는 논리적 부정이 들어 있지 않고, “입자(광자)”라는 말 속에도 “따라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없다”라는 논리적 부정이 들어 있지 않다.

​

이해는 잘 안 되지만, 논리적 모순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역설이라고 부른다.

​

반대로 “결혼한 독신자”, “네모난 원”은 어떤가?

​

“독신자”라는 말 속에는 이미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 들어 있고,

“결혼했다”는 말 속에는 “더 이상 독신이 아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

또 “원”이라는 말 속에는 “경계가 곡선이고 꼭짓점이 없다”는 뜻이 들어 있고,

“네모”라는 말 속에는 “경계가 네 개의 직선이고 꼭짓점이 네 개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

이 정의들을 한 사람, 한 도형에 동시에 적용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결혼하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결혼했다.”

“꼭짓점이 없으면서 동시에 꼭짓점이 있다.”​

​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 아니라, 의미가 서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진술 — 곧 A이면서 동시에 not-A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모순이다.

​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뀐다.

​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다”라는 고백은

빛의 파동-입자 이중성 같은 역설인가,

아니면 결혼한 독신자 같은 모순인가?

​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말하게 된다.

​

​

(2) “참 하나님, 참 인간”

– 모순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 속에 “결코 인간일 수 없다”는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면,

또 “인간”이라는 말의 뜻 속에 “결코 하나님일 수 없다”는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면,

성육신 교리는 곧바로 “결혼한 독신자”가 된다. 그때 그 고백은 더 이상 신비로운 진리가 아니라, 비문(非文)이고, 의미 없는 소리가 된다.

​

그러나 솔직히 말해, 어느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을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안다.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배워야 하고, 모른다는 것을 경험하는 존재.

​

그러나 “하나님”이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것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정의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로 하신 일을 증언하는 길을 택한다.

​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 14).​

​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이 되셨다고 선포하는 순간, 이 사실 자체가 하나의 기준이 된다.

​

“하나님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그 순간 거꾸로 자기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

성육신은 그래서 이렇게 선언한다.

​

“우리가 하나님을 정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신 행동이 하나님을 정의한다.”​

​

그 행동의 정점이 십자가이다.

​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참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십자가는 그저 한 인간의 비극일 뿐이다.

​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자 하나님의 심장이다. 그리고 성육신은 바로 이 십자가를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의 결단이다.

​

​

(3) 예수의 참된 인성

– “특수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

​

성육신 교리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이것이다.

​

“어차피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니,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실은 항상 전지·전능·편재하셨겠지.”​

​

이 생각이 옳다면, 예수의 생애는 일종의 “신이 인간 연기를 한 연극”이 된다.

​

그는 배고픔을 느끼는 척 했고, 피곤한 척 잤으며, 유혹을 받는 척 했을 뿐이다.

​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졌다(눅 2:52).

→ 자라났다는 말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지 않았다는 뜻이다.

​

예수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5:8-9; 2:10).​

→ “배웠다”는 것은, 처음에는 그 상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이렇게 기도하신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 이것이 진심이라면, 그는 정말로 다른 길이 가능한지 “모른 상태”에서 기도하신 것이다.

​

예수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고 말씀하신다.

→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셨다.

​

​

이 모든 증언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

예수는 실제로 우리와 똑같이

배워야 하고, 자라야 하고, 물어봐야 하고,

모르는 가운데서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참된 인간으로 사셨다.

​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

“예수께서 진짜 인간으로 사셨다면, 그는 그동안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편재를 어떻게 가지셨단 말인가?”​

​

전통적인 답변 중 하나는 이른바 “두 마음(이중 의식)”의 그리스도론이다.

​

예수는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

하나는 모든 것을 아는 신적 의식,

다른 하나는 제한된 인간 의식.

​

이 설명은 일견 안전해 보이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심각한 난점을 가진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야 한다.

​

“마리아의 태 속에서 한 점의 수정란 상태로 있을 때에도

예수는 동시에 온 우주의 모든 분자와 별과 역사를

낱낱이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것은 단순한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일까,

아니면 “결혼한 독신자” 같은 진짜 모순일까?

​

만약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 속에

“항상 실제로 전지·전능·편재를 행사하는 존재”라는 정의를 넣고,

또 “인간”이라는 말의 뜻 속에 “실제로 제한된 지식·능력·공간성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정의를 넣는다면,

그 두 정의를 한 인격에게 동시에 적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

“예수는 한 인격 안에서 동시에 전지하면서 전지하지 않고,

전능하면서 전능하지 않으며,

무한하면서 유한하다.”​

​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가 아니라,

개념이 서로를 부정하는 진술 — 곧 A이면서 동시에 not-A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

※참고(기적에 대하여):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기적은 “숨겨진 신성이 새어 나온 자동 실행”이라기보다, 성령과의 온전한 연합 안에서 자신을 비워 드린 한 인간의 순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로 제시된다(눅 4:1, 14; 요 5:19).​

​

​

(4) 비우심(케노시스)

– 하나님이 자기 능력을 내려놓으셨다​

​

빌립보서 2장은 성육신을 설명하는 가장 놀라운 본문이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케노시스),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재구성).​

​

여기서 핵심 동사는 “비우다”이다.

​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내려가셨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구체화된다.

​

“예수는 ‘자신을 비우셨다’고 할 때

무엇을 비우신 것인가?”​

​

만약 예수가 여전히 전지·전능·편재의 행사를 그대로 유지하셨다면,

우리는 정직하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비우셨는가?”​

​

여기서 제시되는 한 가지 일관된 이해는 이렇다.

​

예수는 하나님으로서 가지셨던

전지·전능·편재의 ‘사용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으셨다.

​

다시 말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그분의 것이지만,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그 능력에 기대지 않기로 자기 제한(self-limitation)을 하신 것이다.

​

이것은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셨다”는 말이 아니다.

​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비워지지 않는다.

​

그러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을 자유도 가지신다.

​

그러므로 성육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내려놓을 수 있다.”​

​

이 자기 비움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비슷한 일을 하셨다.

​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인간과 천사)를 창조하신 순간,

그는 자신의 전능의 행사를 스스로 제한하셨다.

​

누군가를 진짜로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려면,

그가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위험도 함께 허용해야 한다.

​

이것이 창조의 첫 번째 “케노시스”이다.

​

성육신에서 일어난 일은 이 논리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것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진짜로 사랑하시기에,

단지 “전능의 사용”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편재의 행사 자체를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헌신하셨다.

​

이 자기 비움의 끝이 십자가이다.



(5) 그럼에도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

–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

​

여기서 결정적 질문이 등장한다.

​

“만약 예수가 전지·전능·편재의 행사를 내려놓았다면,

그는 어떻게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

​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정의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해왔다.

​

모든 것을 아시는 분(전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전능)

어디에나 계시는 분(편재)

​

이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이다.

​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하나님은 전지이시다 =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하나님의 본질이다.”​

​

성경이 “하나님은 ○○이시다”라는 형태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

여기서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다.

​

요한은 이렇게 설명한다.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요일 3:16).​

​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자신을 지키는 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적 자기 희생으로 드러난다.

​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하나님의 전지·전능·편재는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

그러나 사랑 자체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다.

​

이 관점에서 볼 때, 왜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인지가 선명해진다.

​

예수는 인간이 되심으로

전지·전능·편재의 행사는 내려놓으셨다.

​

그러나 단 하나,

자기 자신을 끝까지 내어주는 사랑만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라고 말한다.

​

예수는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완벽하게 구현하셨기 때문이다.

​

십자가는 그 사랑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어둠을 통과하면서도,

오히려 원수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사랑.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전능의 행사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로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본다.

​

​

(6) 십자가가 재정의하는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가리켜 이렇게 선언한다.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스캔달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

​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스캔들이었다.

​

그들은 전능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 믿었다.

​

그 메시아는 로마를 무너뜨리고,

원수를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

그런데 그들이 맞이한 “메시아”는

원수의 손에 붙잡혀 조롱과 채찍과 십자가를 당한다.

​

이것은 그들에게

“이건 절대 하나님일 리 없어!”​

라고 외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들은 신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apatheia),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고통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는

완전한 존재로 상상했다.

​

그런데 십자가는

“자신에게 아무 유익도 안 되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

이것은 그들에게

“이건 신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

라고 여겨지는 모습이다.

​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

그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

무엇이 바뀐 것인가?

​

“능력”과 “지혜”에 대한 정의가 바뀐 것이다.

​

능력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 능력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죄와 악과 사망을 꿰뚫어 이기는 힘이다.

​

지혜는 더 이상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 지혜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아는 지식,

어떻게 타락한 피조물의 자유를 짓밟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선을 이룰 것인가를 아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길이다.

​

​

십자가는 이렇게 선언한다.

​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억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고,

사랑으로 결국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데이터를 다 감지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

각 사람의 자유와 상처와 역사를 고려하면서도

최선의 사랑의 길을 창조해 나가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

성육신과 십자가는,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를 사랑의 관점에서 재정의한다.

​

이 재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옛 철학의 전능·전지 개념을 붙들고 있으면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필연적으로

“논리적 모순”의 덫에 걸려버린다.

​

​

(7) “신비”라는 이름의 모순들

–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

성육신은 역설이다. 우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다 설명할 수는 없다.

​

그러나 그 역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다.

​

그러나 모든 신학적 난제가 이렇게 건강한 역설인 것은 아니다.

​

때로 “신비”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모순인 주장을 덮는 용도로 사용된다.

​

예를 들어, 어떤 신학은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천사의 행위를

영원 전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한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

그러나 여기서 말의 뜻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문제가 드러난다.

​

“자유”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그 선택이 미리 필연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가 들어 있고,

​

“철저한 예정”이라는 말 속에는

“그 선택이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면,

​

“완전히 예정된 선택이면서 동시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은 결국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반드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 아니라,

의미가 서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모순 — 곧 “결혼한 독신자”와 다르지 않다.

​

이것은 빛의 이중성 같은 신비로운 역설이 아니라,

정직하게 말하면 개념의 충돌,

곧 모순이다.

​

성경은 수많은 신비를 말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비는

논리를 파괴하는 신비가 아니다.

​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랑의 깊이와

하나님의 길의 높음을 가리키는 신비이다.

​

그래서 우리는 제기되는 여러 신학적 주장 앞에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

“이것은 단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역설인가,

아니면 개념상 서로를 파괴하는 모순인가?”​

​

성육신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분명한 토대 위에 선 역설이다.

​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그래도 자유다”라고 우기는 예정론은,

그 사랑의 토대를 잃어버린 채

논리의 언어만 흉내 내는 모순일 수 있다.

​

​

(8) 성육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

​

결국 성육신 교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

“하나님에 대한 너의 모든 전제,

모든 개념,

모든 철학적 정의를

예수의 삶과 십자가 아래에 두고

처음부터 다시 써라.”​

​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철학적 최고존재로 그려왔다.

​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고통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과 통제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존재.

​

그 후에 성육신과 십자가를

그 틀 안에 집어넣으려 했다.

​

그 결과, 수많은 “가짜 역설”들이 만들어졌다.

​

동시에 전지이며 비전지인 예수

동시에 전능이며 비전능인 예수

동시에 예정되고 자유로운 인간

동시에 태어났으며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

동시에 고통을 겪으시며 고통을 겪지 않으시는 분

동시에 진짜로 죽으시며 사실상 아무것도 잃지 않으신 하나님...

​

이 가운데에는 우리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진정한 역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그것이 역설이라는 뜻은 아니다.

역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계시의 토대 위에 설 때에만 역설이다.

그 토대를 잃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라 개념이 서로를 무너뜨리는 모순이 된다.

​

그래서 이 중 일부는,

성육신과 십자가를 이미 정해 놓은 신 개념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가 생겨난

모순의 그늘일 뿐이다.

​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안한다.

​

먼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본다.

​

그분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워가고,

눈물을 흘리고, 떨며 기도하고,

결국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 죽으시는 모습을

하나님 자기 계시의 중심으로 받아들인다.

​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이시다.

다른 모든 속성은 이 사랑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

이때 비로소 성육신은 우리에게

단지 어렵고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복음의 심장이 된다.

​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의 고통을 관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 속으로 몸을 던지신 분.

​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가

거기서부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분.

​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자기 권리를 내려놓음으로

우리를 품으시는 분.

​

​

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어떤 어둠 속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울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여기에도 함께 계신다.”​

​

이 고백이 바로

성육신 교리가 우리 삶 속에서 맺는 열매이다.

​

​

(9) 결론

– 십자가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

성육신은 하나의 교리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다.

​

“나는 너희를 멀리서 지켜보는 신이 아니라,

너희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의 상처를 밖에서 분석하는 신이 아니라,

너희의 상처를 내 몸으로 받는 하나님이다.

나는 권력으로 너희를 휘어잡는 신이 아니라,

사랑으로 너희를 부르며 기다리는 하나님이다.”​

​

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전능자를 믿는 것이 아니다.

​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 내어주신

살아계신 사랑을 믿는 것이다.

​

그래서 성육신을 고백하는 모든 교회는

언젠가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다른 얼굴을 가진 분이 아니다.

바로 그 예수의 사랑이

하나님의 전부이다.”​

​

이 고백을 붙드는 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라는 역설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는 논리적 함정이 아니다.

​

오히려 우리의 이성과 영혼을 동시에 깨우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

그리고 바로 그 지혜와 능력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

전능, 전지, 예정, 심판, 지옥, 구원…

​

그 모든 주제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얼굴 아래에서

처음부터 새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

성육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

그러면 위를 올려다보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한 인간의 얼굴을 보라.

그 얼굴에 새겨진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이다.”​

​

이 고백이 심장 깊숙이 내려앉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복음의 하나님을 믿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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