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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멤피스 한인교회 목사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롬10:9,10)-(2)
(전도가 미련한 까닭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지금껏 유대인들의 잘못을 따지려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정작 우리를 되돌아보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과연 그들과 다를 바가 있는가를 말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유대교 같은 확고한 경계지표들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와 성찬식도 이미 믿은 자들이 십자가 복음을 고백하고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불신자가 참여할 수 없어 그들과 구별되는 의식이긴 해도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에서의 불이익이나 출교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서두에 인용한 본문 말씀이 구원으로의 초대에 너무 남용 혹은 오용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주라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 받았다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구원 초대를 하기 위한 전도 형식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여 은혜로 구원을 주신다는 예정 교리에 반대하여 인간 쪽에서 반드시 먼저 믿어야만 한다는 논리의 근거로도 동원됩니다.    

그러나 이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혹은 이 구절만 따로 떼어내어 해석하는 것으로 성경이 정작 말하는 바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지금껏 살핀 대로 문맥상 유대인들을 일차 대상으로 한 말씀이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주 논리적인 바울 사도가 구태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논하면서 이 말씀을 한 까닭을 반드시 따져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이미 그 까닭을 언급했습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가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傳播)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5-8)

신자들이 교리적으로 잘 알고 있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얻는 의”를 주어로 삼아 “이 같이 말하되”라고 의인화(擬人化) 했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얻는 의는 구원 받은 신자를 대변하는 셈인데, 신자도 의인화된 의가 말하는 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말이란 당연히 자기가 믿는 바에서 나오기에 신자의 믿음도 그 말하는 바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의가 말하는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정확하게 따지면 둘 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마찬가지로 의인화 되었음)가 말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의가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와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는데, 믿음의 의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도 그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고 했듯이 의인화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뜻합니다. 율법에 고착 된 그들의 종교적 사상 혹은 정서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따르는 율법의 의를 신자가 따라야 할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의와 비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은 아무도 하늘에 올라갈 수 없고, 음부에 내려 갈 수도 없다고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틀린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객관적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빗대어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사실과,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 둘 다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단순히 인간 랍비에 불과하지 죄인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의 의는 그 반대가 진리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난 그리스도라는 복음입니다. 그는 결코 인간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 본체로서 인간의 모든 죄책을 감당한 대속제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의 앞에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아닌 자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그분과 연합해 같이 죽고 그분의 부활에 연합해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가?

한 죄인이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유대인들이 그분을 배척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예수를 거부했지만, 그 이유는 다 사라지고 더 이상 그분이 자신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살아도 자기 나라만 부강하게 해주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자기들끼리 향유해 오던 고유이익을 놓치지 않으려고  절대로 자기들의 경계지표를 허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땅의 행복과 안일만 추구하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심으로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며 겸허하게 엎드리면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분하지 않고 즉, 아무런 경계지표를 적용하지 않고 하늘의 참 생명으로 새롭게 해주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들로선 그런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순간 지금껏 자신들이 틀렸음도 인정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이려 덮어씌운 덫에 오히려 자기들이 걸려서 영원한 진노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된 형국입니다.

결국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문맥상의 의미는 자기 심령 깊숙이 예수를 배척하려 했던 어떤 이유나 근거라도 완전히 없앤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에 대해 완전히 뒤바뀌어진 마음에서 그 신앙고백도 자연히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그 죄를 없앨 방도란 그분의 십자가 죽음 밖에 없음을 철두철미 깨닫는 체험적 고백으로 말입니다.    

또 지금까지 재물을 주인으로 삼았던 헛되고 헛된 인생 여정에서 돌이켜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이 180도로 완전히 바뀌었기에 단지 그 사실을 사실대로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님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이 실제로 자기 인생을 붙들어주는 가장 근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단순히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입술로 시인한다고 믿음이 생기거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대속 죽음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믿으라고 하니까 그 종교적 진술이 객관적으로 옳기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심지어 앞으로 믿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뜻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입술로 그분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갖고 있던 것 같은 편견, 선입관, 왜곡, 오해, 거리낌, 등을 완전히 버리고 진짜로 그분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사렛의 목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자기 생명을 가름하는 절대적이고도 온전한 진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도 예수가 정말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됨으로써 바울처럼 예수의 가장 극렬한 핍박자에서 가장 열렬한 옹호자가 되는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변화가 생긴다면 그 마음에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한 치의 의심과 주저함도 없기에 입술로 자동으로 시인하게 되는 법입니다.  

흔히들 세상에선 유대인들이 동족이었던 예수를 가장 쉽게 믿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믿지 않느냐고 반발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뜻은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가장 믿기 어려운 상황과 종교적 선입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모두가 나사렛 예수는 이단으로 여기기에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그만큼 잘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 거듭난 그는 그야말로 예수 외에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온전히 실감했습니다. 십자가 구원이야말로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이기에 그 믿음의 말씀을 동족에게 간절히 호소하겠다는 것입니다.  

“입술로 시인하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보내져야 한다.”는 말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내용입니다. 대신에 바울이 그 뒤에 결론을 어떻게 내렸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어찌(how)”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도저히 다른 수단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기 가장 힘든 사상과 관습에 젖어 있는 유대인들로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하든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저주 받은 죽음을 당했기에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끝까지 우겨도, 아니 그럴수록 전하지 않고는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이여 제발 어떻게 하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을 전하는 자도 바울과 같은 절박함으로 전해야 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철학적으로 심오한 사상을 가졌고 종교적으로도 경건해도, 그래서 예수가 도무지 이해도 안 되어 믿을 수 없다고 우겨도 예수를 모르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그런 가장 어려운 자들에게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본문은 전도해야할 당위성과 절박성을 강조한 것이지 전도의 절차를 뜻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까지 왜곡하는 유대인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해야 한다는 본문에 대한 또 다른 오류는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는 측에서 인간이 적극적, 능동적, 의지적으로 먼저 믿어야만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래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예리하게 지적하고서 믿음의 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인간 랍비에 불과하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유대인 나름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또한 모세오경을 신성시하여서 문자적으로만 해석 적용한데서 기인했습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음부에 내려가겠느냐?(인간 예수는 절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올라간 것도 아니다)”라는 그들의 생각도 오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그것도 일부만 떼서 자기들 편견에 끼어 맞추어서 해석한 데서 생겼던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命令)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신30:11,12)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전수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이 하늘 높은 곳에 있기에 인간이 지키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런 의미를 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에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3,14절) 하나님의 계명이 먼 바다 밖에 있지 않고 네 마음 즉,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으니 네 마음만 온전히 바뀌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바울이 자기들이 전파한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하라”고 권면한 이유가 자명해지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구약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말씀이 네 입에 있다”는 히브리적인 표현은 그 말씀들을 항상 암송하며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진심으로 믿고 암송하니까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며 또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께만은 일부만 문자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율법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부분은 생략하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만 동원한 것입니다. “하늘에 있지 않다”, 또 “바다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율법이 멀지 않다는 비유적 표현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인간은, 특별히 예수는 절대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는 뜻으로 오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세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곳(시내 산)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율법을 받아 왔으니 율법을 대체할 구원 수단은 전혀 없다고 자부하며 고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도 없고 출신 배경이 의심스런 랍비가 나타나 자기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이 말씀은 율법을 신성시하려는 목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매일 암송 묵상하면서 진심으로 믿고 실천하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모세나 율법 자체가 구원의 수단 혹은 매개체가 아니고 대신에 율법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13-24 일부만 발췌)

율법을 자랑하고 가르치면서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방인 중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모독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신자의 형편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자체만 신성시 했지 율법에 담긴 뜻은 무시했습니다.

거기다 분명히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일부만 떼어내어서 예수를 비방 배척하는데 오용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만 문자적으로 적용하여서 회중을 오도하는 오늘날의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런 목회자만 비방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일 수밖에 없기에 더더욱 십자가 복음만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도 이전에는 동족들과 똑 같이 율법에 대해서 왜곡 편향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 구체적으로는 예수를 배척하는 이유를 훤히 꿰뚫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부터 그들과 똑 같은 거리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을 표면적 문자적으로 지키면 의인이 되는 줄 믿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유대인들의 오류를 정확히 지적한 이유도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너무나 생생하게 실감했기에 그 둘을 대비해서  마음에서 자연히 따라 나오는 믿음을 강조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모세만 추종하지만 예수가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언젠가 오실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생긴 예수에 대해 거리끼는 마음을 전부 없애고 그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동족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진노의 형벌 뿐이니 그들 대신에 자기가 그 벌을 받겠다는 심정과 각오로 제발 복음을 온전히 들어보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율법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암송하면서 마음에 완전한 자기 것으로 바뀌어져 있으면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입보다 더 자기에게 가깝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과 인간의 믿음

문제는 이 말씀과 달리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사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말씀의 암송 묵상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더욱 엄격히 잘 지키려고 실생활에 맞게끔 구체적으로 세분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율법으로 유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그야말로 율법을 가까이 두었는데도 왜 실패를 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마음으로 지키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실제 마음은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있었기에 율법은 단지 형식으로만 지켰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마음은 참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던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계기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경계지표 중의 하나인 정결례를 구실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도록 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장로의 유전을 더 심긴다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의 관습과 전통을 중시하는 것은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며, 그 사회에서 출교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은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바로 이어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이의 마음이 이미 더럽혀져 있기에 입술로는 “주여!”라고 해도 하나님을 멀리 한 채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민족인 유대인들이, 그것도 가르치는 이들마저 이러니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정죄함이 있고 죄의 삯은 사망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결국 자연인이 복음을 전해 듣고 마음으로 믿으려 한다고 온전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 성령의 간섭으로 그 마음 밭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옥토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사단에 미혹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보지 못하는 영혼을 하나님이 새롭게 하여 새사람으로 바꾸어주어야만 합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율법이 가까이 있기에 행할 수 있다는 신명기 30:11-14 계명 바로 앞에도 그런 뜻의 말씀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고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 딸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당신의 택한 백성의 마음에 먼저 할례를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예수님이 율법을, 특별히 장로의 유전을 문자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들 모두를 당신께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마치 누구나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앞에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천국 복음을 듣고도 지혜로운 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전혀 회개치 않고 당신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것을 꾸짖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4-27)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만 이뤄집니다. 그리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합니다.

심지어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하라는 본문에 바로 이어서도 그런 뜻을 명학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롬10-18-21)

이스라엘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들어서 알고도 순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거슬려 말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 내 손을 벌렸다고 합니다. 십자가가 거리낌이 된다는 자가당착적 이유로 아직도 예수를 부인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긍휼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 계획에 따라 택한 자의 마음에 당신께서 할례를 해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도가 미련한 까닭은?

바울이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로마서 9, 10 두 장에 걸쳐서 설명하면서 어떻게 결론을 내렸습니까? 아무리 유대인 나름의 믿지 못하는 이유들이 많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이방인이 먼저 많이 믿게 만든 후에 유대인들도 믿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유대인들이 더러는 악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말로 전해 듣고 마음을 믿어 입술로 시인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선도적, 일방적, 주도적, 절대적인 은혜가 한 죄인에게 임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마음에 주시는 할례를 받고서 복음을 들어야 아들의 소원대로 복음의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또 그 계시에 대해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온당한 반응이 믿음인 것입니다.    

바울이 “어찌”를 네 번이나 반복해 강조했던 이유는 동족의 구원을 갈망하는 그의 애끓음의 반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느 때에 동족 중에 어떤 자를, 얼마나 많이 구원하실 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니까 더더욱 복음을 말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충분하다고 구원을 자신하고 있는 유대인일수록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풀어서 전해야 하고, 그 계시를 받을지 아닐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고전1:21)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라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하나님의 지혜는 심오하고 복잡한 교리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살아나 승천하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고 따르지 않으면 어떤 소망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짧고 단순해도 모든 이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또 이 지혜는 말로 전해짐과 동시에 성령의 역사가 따라야만 하기에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 단순히 구원으로 초청하는 전도절차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또 인간의 자유 의지로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세상 지혜로는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유대인은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편견에 싸여 완악하게 믿지 않는 동족 유대인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긴 바울의 비장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전도를 단지 종교적 의무로만 간주해선 안 됩니다. 세상 지혜에 가려 예수에 대해 어두워진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우니 하나님께서 제발 그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새사람으로 바꿔달라는 바울 같은 간절함을 품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이 있으면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의 참의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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