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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 2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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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영원한 고문실인가, 
생명을 거부한 자의 최종 상실인가
— 둘째 사망의 불 앞에서 다시 묻는 영생의 선물과 
어린양의 사랑



서론
(1)지옥론은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묻는 질문이다

지옥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장소를 묻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는 질문이다. 우리가 지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로 보일 수도 있고, 악인을 끝없는 고통 속에 영원히 붙들어 두시는 우주의 형벌 집행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옥론은 복음의 주변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인간의 운명, 죄의 본질, 구원의 의미, 새 창조의 완성을 모두 건드린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온전히 계시되셨다. 그리고 그 계시의 절정은 십자가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저주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 피 흘리신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원수를 끝없는 의식적 고통 속에 영원히 보존하시는가? 성경은 정말 악인의 최종 운명을 “끝없이 고통받는 생존”으로 가르치는가? 아니면 “생명으로부터의 최종적 단절과 멸망”으로 가르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조건적 불멸론, 또는 멸절론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견해는 심판을 부정하지 않는다. 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사망”, “멸망”, “파멸”, “불사름”, “둘째 사망”이라는 언어를 더 정직하게 들으려는 시도다.

이 글의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성경은 인간이 본래 불멸하는 영혼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영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한 자의 운명은 영원한 고통 속의 생존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지는 최종적 상실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과 더 잘 어울린다.


본론 1:
영생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2)무너져야 할 전제: 인간은 스스로 영원하지 않다

전통적 지옥론의 깊은 밑바닥에는 흔히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다. 인간에게는 본래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전제다. 이 전제에 따르면 의인도 영원히 존재하고 악인도 영원히 존재한다. 차이는 영원한 행복이냐 영원한 고통이냐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본래적으로 불멸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불멸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인간은 생명을 소유한 자이기 전에 생명을 받은 자다. 인간 안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영생이 있다.

요한복음 3:16은 이것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이유는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여기서 대조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고통이 아니다. 대조는 멸망과 영생이다. 로마서 6:23도 마찬가지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 죄의 삯은 고통스러운 영생이 아니라 사망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불멸의 확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영생이다.

창세기 3장도 같은 진실을 보여준다. 범죄한 인간은 생명나무로부터 차단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본래 영원히 사는 존재라면, 생명나무로부터 차단될 필요가 없다. 생명나무가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영생이 본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생명의 선물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는 인간을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놓았다.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도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참 생명을 누리는 존재다.

그러므로 지옥론의 출발점은 바뀌어야 한다. 악인도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성경의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전환이 이루어질 때, 지옥은 더 이상 불멸하는 영혼이 영원히 고통받는 장소로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한 존재가 생명 자체를 잃는 최종적 심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3)“영원한 형벌”은 끝없는 과정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다

물론 성경은 “영벌”, “영원한 심판”, “영원한 멸망”을 말한다. 이 표현들은 지워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것들이 반드시 끝없이 계속되는 고통의 과정을 뜻하느냐이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끝없이 속죄 행위를 반복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속죄의 결과가 영원하다는 뜻이다. 같은 방식으로 “영원한 심판”“영원한 멸망”도 심판과 멸망의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결과가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일 수 있다.

“영원한 멸망”이라는 표현 자체를 생각해보자. 멸망이란 어떤 존재가 생명의 자리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데 “끝없이 멸망하면서도 결코 멸망하지 않는 상태”는 논리적으로 어색하다. 오히려 성경의 표현은 이렇게 이해될 때 더 자연스럽다. 악인은 영원히 멸망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멸망하며 그 결과가 영원하다.

“꺼지지 않는 불”“죽지 않는 벌레”도 같은 흐름에서 읽을 수 있다. 꺼지지 않는 불은 대상을 영원히 보존하는 불이 아니다. 아무도 끌 수 없기에 대상을 끝까지 태우는 불이다. 죽지 않는 벌레도 고통을 영원히 유지하는 벌레가 아니라, 심판받은 시체를 완전히 삼킬 때까지 멈추지 않는 이미지다. 이사야 66장의 배경에서 이 장면은 살아 있는 자들이 끝없이 고통받는 장면이라기보다, 심판받은 자들의 수치와 최종적 파멸을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따라서 성경의 “영원한 형벌”은 악인을 끝없이 살려두어 고통을 주는 형벌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한 결과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최종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옥의 영원성은 고통의 무한한 지속이 아니라, 생명 상실의 최종성에 있다.


본론 2:
성경의 심판 언어는 “끝없는 생존”보다 “최종적 소멸”을 가리킨다

(4)구약의 증언: 악은 보존되지 않고 사라진다

이제 성경 전체의 언어를 들어보아야 한다. 구약은 악인의 운명을 말할 때 반복적으로 사라짐, 끊어짐, 불타 없어짐, 재가 됨, 기억에서 지워짐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 언어들은 단순한 시적 장식이 아니다. 성경이 악의 마지막을 상상하는 방식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베드로후서 2:6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재가 되게 하시고, 그것을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본보기로 삼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본보기는 영원히 살아 있는 고통이 아니다. 재가 됨이다. 존재하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시편은 이 주제를 더욱 풍성하게 노래한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풀처럼 시들고, 연기처럼 사라지며, 잠시 후에는 그 있던 곳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시편 37편은 악인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시편 58편은 그들이 흘러가는 물처럼, 녹아가는 달팽이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오바댜는 악인이 “본래 없던 것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은 악인에게 “장래가 없다”고 말하며, 악인의 등불이 꺼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미지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겨는 창고에서 영원히 고통받지 않는다. 불쏘시개는 불 속에서 영원히 보존되지 않는다. 연기는 사라진다. 풀은 마른다. 등불은 꺼진다. 재는 생명의 지속이 아니라 생명의 소진을 가리킨다.

물론 구약의 심판 언어에는 시적이고 상징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그 상징들이 향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악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영원히 보존되지 않는다. 악은 끝난다. 하나님을 거부한 생명체는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다.

이 점은 하나님의 성품과도 연결된다. 구약은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같은 방식으로 영원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지만, 그의 진노는 악을 제거하는 거룩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가 똑같이 영원한 두 기둥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 사랑을 파괴하는 악에 대한 거룩한 불이다. 그리고 그 불의 목적은 악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끝내는 것이다.


(5)신약의 증언: 생명인가, 멸망인가

신약은 구약의 흐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분명하게 만든다. 침례 요한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가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메시아가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불은 쭉정이를 영원히 보존하지 않는다. 쭉정이를 태운다.

예수님도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불에 던져진다. 가라지는 불사르게 된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밖에 버려 말라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사른다. 이 모든 이미지는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불살라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고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하신다. 대조는 분명하다. 멸망과 생명이다. 마태복음 10:28은 더 결정적이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지옥이 영혼의 본래적 불멸을 전제하는 장소가 아니라, 몸과 영혼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멸망할 수 있는 자리임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언어도 같은 방향을 가진다. 야고보는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십자가의 원수들의 마지막이 멸망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게 멸망이 임한다고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악인에게 갑작스러운 멸망이 임한다고 말한다. 베드로후서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멸망의 날을 말한다.

이 모든 본문을 하나로 모으면 신약의 기본 대조는 선명하다.

생명사망.
구원멸망.
영생파멸.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하나님 밖에서 생명을 잃는 것.

전통적 지옥론은 이 대조를 흐릴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 지옥론에서 악인도 사실상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복된 영생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영생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의 운명을 “고통스러운 영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경은 그것을 사망이라고 부른다. 멸망이라고 부른다. 둘째 사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신약의 언어를 정직하게 들으면, 악인의 최종 운명은 끝없는 생존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상실이다.


(6)요한계시록의 불: 영원한 고문인가, 둘째 사망인가

물론 어려운 본문이 있다. 요한계시록 14장과 20장은 악인이 “세세토록”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을 담고 있다. 이 본문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말씀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다. 용, 짐승, 음녀, 뿔, 머리, 유황불, 불못, 새 예루살렘은 모두 강력한 상징 언어다. 상징은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깊은 실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상징을 무조건 문자적 장면으로 바꾸면, 본문이 가진 묵시적 메시지를 좁혀버릴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표현은 이사야 34장의 에돔 심판과 연결된다. 이사야는 에돔의 불이 밤낮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영원히 올라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돔의 연기가 지금도 물리적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표현은 심판의 돌이킬 수 없음, 완전한 황폐, 회복 불가능한 파국을 가리키는 상징적 언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유사한 표현도 반드시 끝없는 의식적 고통의 시간으로 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 자체가 불못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요한계시록은 불못을 “둘째 사망”이라고 부른다. 둘째 고통이 아니다. 둘째 영생이 아니다. 둘째 사망이다. 첫째 사망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죽음이라면, 둘째 사망은 최종 심판 이후 생명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지는 궁극적 죽음이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비전도 이것을 뒷받침한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영원한 고문실이 아니다. 사망과 음부까지 불못에 던져지고,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으시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게 되는 새 창조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불은 악을 영원히 보존하는 불이라기보다, 악과 사망 자체를 끝장내는 하나님의 최종 심판으로 읽는 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과 더 잘 어울린다.


본론 3:
십자가와 새 창조는 영원한 고통보다 최종적 생명을 증언한다

(7)십자가의 하나님은 고통을 영원한 질서로 만들지 않으신다

성경의 언어를 살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품을 물어야 한다. 신약의 중심 계시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이다.

전통적 영원 고통 지옥론에서 악인의 고통은 회복적이지 않다. 그들은 고통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 정화되지 않는다. 회개로 나아가지 않는다. 변화되지 않는다. 그 고통은 아무 목적 없이 계속된다. 천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고, 억만 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으며,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도 그 형벌은 여전히 시작점에 머문다.

이것은 정의라고 하기가 어렵고, 사랑이라고 하기는 더 어렵다. 정의는 악을 폭로하고 책임을 묻고 질서를 바로 세운다. 그러나 아무 회복도, 아무 종결도, 아무 완성도 없는 고통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그것은 정의의 완성이라기보다 고통의 영원화가 된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십자가는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죄인을 멀리서 고통 속에 밀어 넣어 자신의 의를 증명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 만든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그 고통을 자신 안에 짊어지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의 사랑과 모순될 수 없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나라에 악이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을 무의미한 고통 속에 영원히 보존하시는 분도 아니다. 끝까지 생명을 거부한 존재에게 남는 것은 고통스러운 또 하나의 영생이 아니라, 생명의 거두어짐이다.


(8)하나님의 승리는 영원한 지옥 왕국을 남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심판의 성격을 밝힌다면, 하나님의 최종 승리는 심판의 목적을 밝힌다. 성경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신다고 말한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악인들이 영원히 의식적으로 고통받으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영역이 우주 한편에 남아 있다면, 하나님의 승리는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가? 새 창조 옆에 영원한 고통의 세계가 병존한다면, “다시는 사망이 없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 밖에 영원히 울부짖는 세계가 남아 있다면, 우주는 정말 온전히 화해된 것인가?

성경의 마지막 비전은 악이 격리되어 영원히 보존되는 세계가 아니다. 악이 제거된 세계다. 사망이 어디선가 계속 작동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망 자체가 심판받는 세계다. 눈물이 다른 장소에 영원히 모여 있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세계다.

멸절론은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의 최종 승리를 더 깊이 붙든다. 하나님은 악을 영원히 관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악을 끝내신다. 하나님은 고통을 우주의 영원한 구조로 남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새 창조를 완성하신다.

마지막에는 두 왕국이 남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의 왕국이 나란히 영원하지 않다. 마지막에는 어린양의 보좌가 남는다. 생명이 사망을 삼킨다.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을 영원히 보존하지 않고, 악 없는 세계를 완성한다.


(9)심판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멸절론은 지옥의 두려움을 약화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적 심판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

성경에서 가장 두려운 운명은 하나님께 고통을 받으며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운명은 하나님 없는 생명의 끝에 이르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존재의 가능성 자체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경고가 아니다.

또한 멸절론은 악인이 아무 고통 없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하고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죄는 폭로될 것이고, 악은 드러날 것이며,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거짓의 실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빛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끝까지 거부한 자에게 그 빛은 고통스러운 심판으로 경험될 수 있다.

다만 그 심판의 목적은 고통의 영원화가 아니다. 심판은 악을 드러내고, 악의 거짓 권세를 무너뜨리며, 하나님 나라에서 악을 제거하는 사건이다. 심판은 실재한다. 두렵다. 엄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는 고문이 아니라 최종적 진실의 드러남이며, 생명을 거부한 존재가 맞이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다.

복음의 경고는 과장될 필요가 없다. 성경 그대로도 충분히 두렵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거짓은 결국 생명 자체를 잃게 만든다. 사랑을 끝까지 거부하는 자유는 마침내 사랑 없는 존재로 굳어진다. 빛을 끝까지 거부하는 자는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 이것이 심판이다.


결론:
복음의 마지막 말은 공포가 아니라 생명이다

(10)지옥의 경고는 생명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호소다

이 모든 논의의 목적은 지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을 지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심판을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빛 안에서 바르게 이해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악을 영원히 허용하는 무력한 감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러나 그 거룩함은 고통을 영원히 즐기는 잔혹함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신다. 그러나 그 심판은 새 창조를 향한다.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최종 목적은 고문이 아니라 생명이다.

지옥은 하나님이 악인을 끝없이 살려 고통 주시는 장소로 이해되기보다, 생명을 끝까지 거부한 존재가 마침내 생명을 잃는 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원한 형벌은 끝없이 계속되는 고통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상실이다. 둘째 사망은 영원한 고통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생명으로부터의 궁극적 단절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마지막 말은 공포가 아니다. 초청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그 목적은 세상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경고는 진지하다. 생명을 거부하면 생명을 잃는다. 빛을 거부하면 어둠이 남는다. 사랑을 거부하면 자기 자신이 사랑 없는 존재로 굳어진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끝없는 고문실이 아니다. 어린양의 보좌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망의 영원한 통치가 아니다. 사망의 멸망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고통의 영원한 보존이 아니다. 모든 눈물을 닦으시는 하나님의 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을 말할 때도 십자가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 밖에서 지옥을 말하면 하나님은 쉽게 공포의 대상으로 왜곡된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지옥을 말하면 우리는 더 깊은 진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죄를 끝내신다. 그러나 사랑을 끝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악을 소멸하신다. 그러나 생명을 원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의 심판은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바닥에도 사랑이 흐른다. 그 사랑은 지금도 우리를 부른다.

생명으로 돌아오라.
영생은 너희 안에 있지 않다.
영생은 하나님께 있다.
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어졌다.
멸망하지 말고 생명을 얻으라.

하나님의 마지막 얼굴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웃는 폭군의 얼굴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위해 피 흘리신 어린양의 얼굴이다. 그 얼굴 앞에서 지옥론도, 심판론도, 영생론도 다시 정화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성경의 경고와 복음의 아름다움을 함께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영원히 고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악을 끝내신다.
그리고 생명을 원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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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망의 불 앞에서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 사랑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사랑.
이제 그 사랑 앞에 조용히 머뭅니다.

묵상 찬양: 최준섭(조셉 붓소) 〈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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