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선언: 계시는 문서가 아니라, 인격의 피 흘림으로 완성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요한복음은 계시의 정점을 ‘글’이 아니라 ‘몸’으로 말합니다.
말씀은 문장이 아니라, 살이 되고, 피 흘리고, 눈물 흘리며 우리 곁에 거하신 인격입니다.
예수는 성경의 ‘완성’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던 하나님이 누구셨는지를 ‘몸으로 해석해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시 A: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 성경을 외웠으나, 말씀은 알지 못한 자들 (눅 24장)
예수께서 부활 후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7)
그들의 눈은 결국 떡을 떼는 자리에서 열립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눅 24:31)
그들은 말씀을 머리에 알고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이 떡에 나타날 때 비로소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계시는 성경의 문장 안에 갇힌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수와의 만남 속에서 여전히 열려 있었습니다.
*예시 B: 요한계시록 5장 – 인봉된 책과 그 봉인을 여신 어린양
요한이 하늘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보며 통곡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펴거나 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장로 중 하나가 말합니다: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기셨으니,
그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계 5:5)
그리고 요한이 돌아보았을 때 본 것은:
“죽임당한 어린양” (계 5:6)
성경의 비밀, 곧 계시의 문서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사랑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습니다.
<계시는 신학 지식의 방대한 체계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와 상처로만 열립니다.>
<계시는 교리의 정교함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차단되었던 생명나무 곧, 십자가에서 찢기신
어린양의 피와 상처로만 열립니다.>
*예시 C: 마르다와 마리아 – 부활의 교리를 안다 해도, 예수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시는 열리지 않는다 (요 11장)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을 때,
마르다는 부활 교리를 정확히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그녀는 올바른 교리를 말하지만,
예수는 그곳에서 울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5)
계시는 교리의 정당성이 아니라,
상처 앞에서 함께 우시는 하나님 안에서 열립니다.
계시는 기록이 아니라 위로이며,
판단이 아니라 품이며,
마무리된 문서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말씀하시는 인격의 음성입니다.
결론: 성경은 봉인이 아니라 창문이어야 한다
성경은 법전이 아니라, 사랑의 창입니다.
계시는 사건이 아니라, 인격의 만남입니다.
말씀은 침묵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오늘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울고 계십니다.
복음은 그 성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상처를 만나게 하는 ‘영원히 열려 있는 문’으로 해석합니다.
말씀은 아직도 울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