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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 고린도전서 3:15


==================================================

사랑받은 자는 마침내 온전해진다
ㅡ“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사후 성화를 부정하는가



1. 단순히 ‘죽은 뒤 어디로 갔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 위 강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난해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그는 침례를 받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선행을 쌓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교리를 정리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회복하고 보상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저 죽어가는 자리에서, 함께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바로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은 성화가 죽음 이후 하나님의 사랑의 불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면, 이 강도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가 바로 그날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정화, 성화, 품성의 완성이라는 생각은 이 말씀과 충돌하는 것 아닙니까?

이 질문은 가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 안에는 구원, 성화, 심판, 낙원, 부활,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변화라는 거대한 주제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서둘러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강도를 통해 우리는 “구원은 전적인 은혜인가?”라는 질문과 동시에, “구원받은 인간은 어떻게 완전히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2. 성경은 사후 세계를 하나의 단순한 시간표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깔끔한 도표로 정리해 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러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때로는 “낙원”을 말하고, 때로는 “아브라함의 품”을 말하며, 때로는 “음부”를 말하고, 때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말합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최종 소망으로 제시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죽음 직후의 상태에 대해서도 성경은 한 가지 이미지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20절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8–9절도 예수님께서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식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의 영역에 내려가셨다는 고백과 연결해 왔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죽은 날 낙원에 가셨습니까? 죽음의 영역에 내려가셨습니까?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낙원은 아버지의 최종적 임재와 같은 장소입니까? 아니면 다른 상태입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억지로 모든 것을 하나의 지리적 지도처럼 맞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사후 세계를 관광 안내서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죽은 뒤의 공간 구조”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강도에게 주어진 약속의 중심은 “어느 장소에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버려지지 않는다. 너는 나와 함께 있다. 죽음도 너를 내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3. “오늘”은 성화의 완료 시점보다 은혜의 즉각성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중요합니다. 그 말씀은 구원이 먼 미래로 미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강도는 죽기 전에 긴 종교적 과정을 거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회심 이후 선한 삶을 증명할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조건부 대기 판정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앞으로 충분히 변화되면 내가 너를 기억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과거를 보상하면 내가 너를 받아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죽은 뒤 일정한 기간을 통과하면 그때 낙원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받아주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심장이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기 품성을 완성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완성된 사람이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겼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받아들여졌다는 것과 완성되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것과 내 안의 모든 왜곡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는 것과 아들의 상처가 다 치유되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강도는 그날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가 그날 새 창조의 완전한 인간으로 부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히 치유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은혜의 지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의 마법적 완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4. 낙원은 최종 완성의 새 하늘과 새 땅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최종 소망은 단순히 “죽어서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최종 소망은 몸의 부활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금요일에 죽으셨지만,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강도 역시 그날 몸으로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을 곧바로 최종적 부활 세계, 곧 새 창조의 완전한 상태와 동일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강도에게 “오늘 네가 완전한 부활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오늘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에 네가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낙원은 최종 완성 이전의 복된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낙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복된 안식이지만, 아직 몸의 부활과 새 창조의 최종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후 성화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도는 그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복된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의 치유와 변화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치유와 변화가 가장 안전하고 복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낙원은 정화가 필요 없는 장소라기보다, 정화조차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낙원은 고통이 전혀 없는 무감각의 공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고통마저 절망이 되지 못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불은 멸망시키기 위한 불이 아니라 정결하게 하는 
사랑의 불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종종 불의 이미지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불은 언제나 단순한 고문이나 보복의 이미지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각 사람의 일이 불로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의 공력은 남고, 어떤 사람의 공력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불은 사람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불이 아닙니다. 불은 그 사람 안에 쌓여 있던 거짓된 것, 헛된 것, 사랑이 아닌 것,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는 것을 태우는 불입니다.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거짓된 공력은 불탑니다.

이것은 복음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함께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지만,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으십니다. 사랑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치유합니다. 사랑은 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거짓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 불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차갑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의 거짓이 그 사랑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의 어둠이 그 빛 앞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정화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셔서 주시는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의 죽음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의사가 종양을 제거할 때 환자는 아픕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의사의 증오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깊은 상처를 소독할 때 쓰라립니다. 그러나 그 쓰라림은 치료자의 잔인함 때문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 앞에서 자기기만이 드러날 때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 진실하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입니다.

하나님의 불도 그렇습니다. 그 불은 사랑 밖에 있는 형벌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거짓을 태우며 우리를 참됨으로 이끄는 불입니다.


6. 낙원의 기쁨과 정화의 고통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낙원이라면 어떤 고통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는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회개의 눈물에는 아픔이 있지만, 동시에 이상한 평안이 있습니다. 용서를 받을 때 부끄러움이 밀려오지만, 동시에 깊은 안식이 찾아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기쁘면서도 자기 안의 비참함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세월 가족에게 상처를 주며 살다가 마침내 사랑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집에 돌아왔기 때문에 기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분명해질수록 자신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도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웁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버림받은 자의 절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흘리는 치유의 눈물입니다.

낙원에서의 정화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낙원은 하나님께 거부당한 장소가 아닙니다. 낙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의 정화는 공포의 심판이 아니라, 분명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유의 심판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희미하게 보기 때문에 정화의 고통이 종종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드러날 때, 하나님의 얼굴이 분노와 정죄로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원에서는 다를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화는 여전히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절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불을 붙드신 분이 우리를 미워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낙원은 고통이 전혀 없어서 낙원인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도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낙원입니다.


7. 십자가의 강도는 정화 면제의 증거가 아니라 
구원의 본질을 보여주는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강도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는 “성화 없이도 괜찮다”는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은 변화될 필요가 없다”는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복음의 두 진리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첫째, 구원은 은혜입니다.
강도는 자기 의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숨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거래를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받아주셨습니다.

둘째, 은혜는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변화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제 참된 변화가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 죄를 끝까지 숨기려 합니다. 정죄받을까 두려운 사람은 자기 거짓을 방어합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들어간 사람은 비로소 자기 안의 어둠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강도는 그날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 순간 모든 성품의 왜곡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과거, 그의 폭력성, 그의 두려움, 그의 상처, 그의 왜곡된 욕망, 그의 자기방어가 아무 과정 없이 즉시 사라졌다고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인격을 지우는 마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재설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설득하시고, 비추시고, 드러내시고, 녹이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것은 강압이 아니라 치유입니다. 그것은 조작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강도의 이야기는 사후 정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부족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즉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그는 끝내 온전하게 치유될 것이다.”


8. 예수님과 함께 있음이 낙원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사실 “낙원”보다 “나와 함께”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이 낙원인 이유는 그곳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도 황금길이나 진주문 때문이 아닙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서 더 이상 왜곡되지 않은 얼굴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도에게 주어진 약속은 공간의 약속이기 전에 관계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죽음 뒤에 어떤 복된 장소로 갈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은 장소 이전에 관계입니다. 구원은 형벌 면제 이전에 연합입니다. 구원은 미래의 보상 이전에 그리스도와의 함께 있음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함께 있음”이 정화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서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빚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폭로는 파괴합니다. 그러나 사랑 안의 폭로는 치유합니다.
은혜 없는 불은 공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불은 정결입니다.
정죄의 빛은 숨게 만들지만, 십자가의 빛은 돌아오게 만듭니다.

강도는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정화를 경험하든, 그것은 결코 버림받은 자의 형벌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치유였습니다.


9. 심판은 복음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 방식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심판을 사랑의 반대편에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갑자기 사랑을 중단하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거짓과 악과 죽음을 끝까지 상대하시는 사건입니다.

사랑은 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중독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폭력을 묵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기만을 영원한 인격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은 우리 안의 사랑 아닌 것을 반드시 태우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후 정화는 복음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더 깊게 만듭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를 대충 눈감아 주신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되, 그 죄인을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균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만 받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받아주신 사람을 반드시 온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두 진리 중 하나만 붙들면 복음은 왜곡됩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만 받아주신다고 하면, 십자가의 강도는 희망을 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신다고 하면, 새 창조의 소망은 무너집니다.

복음은 이 둘을 함께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부족한 자를 지금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받아주신 자를 끝내 사랑의 형상으로 완성하십니다.


10. “오늘 낙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음”은 함께 참입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후 성화를 부정하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사후 성화를 복음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강도는 그날 구원받았습니다.
강도는 그날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습니다.
강도는 그날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강도는 그날 낙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가 몸의 부활과 새 창조의 최종 완성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이 곧 그의 인격 안에 있던 모든 어둠과 상처와 왜곡이 아무 과정 없이 사라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복된 상태에 들어갔고, 바로 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치유와 완성을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정화 없이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 정죄 없이 사랑 안에서 정화될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정화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불이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은 그 안의 모든 거짓을 태우고 그를 참된 인간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11. 결론: 강도는 낙원에 들어간 미완성의 성도였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너무 부족하게 사랑합니다. 너무 많이 실패합니다. 너무 자주 자기 자신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사랑받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방어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나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했으나 아직 그리스도를 닮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그런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받아주십니다. 품어주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내 정결하게 하십니다. 끝내 온전하게 하십니다. 끝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원은 도피처일 뿐 아니라 치유의 자리입니다. 그곳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화는 있습니다. 그곳에는 버림받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드러남은 있습니다. 그곳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불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삼키기 위한 불이 아니라, 우리 안의 죽음을 태워 우리를 살리기 위한 불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그날 낙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성된 자로서 낙원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랑받는 자로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랑받는 자는 마침내 온전해집니다.

이것이 복음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자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약속은 사후 성화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복음의 빛 안에 세웁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정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정화조차 더 이상 정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불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 불이 사랑의 손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미완성의 인간도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진 인간은 끝내 사랑의 형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구원은 늦지 않습니다.
은혜는 즉각적입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은, 마침내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온전히 살리기 위해 타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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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2026.06.12 04:43

    필자의 글들은 성경을 함께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한 작은 참고일 뿐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직접 살피고,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중하고 진실하게 분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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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uth4us 2 시간 전

    그래서 예수님의 형상이 완성되는 때가 언제라는 말씀인지요?
    1. 예수님의 재림 이전이다.
    2. 예수님의 재림 직전이다.
    3. 예수님의 재림 이후이다.

    4.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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