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누군가 다시 죄를 선택하여 천국을 망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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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자유가 사라지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완성되는 곳입니다
ㅡ왜 새 창조에서는 다시 죄가 시작되지 않는가
서론
1. 천국에 관한 정직한 질문
성경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창조에 관하여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장 4절
얼마나 아름다운 약속입니까. 그러나 이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한 가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천국에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누군가 다시 죄를 선택하여 천국을 망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죄와 고통과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관계되어 있다면, 새 창조에서도 우리가 자유를 유지하는 한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반대로 죄를 선택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천국의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인격체가 아니라 프로그램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됩니다.
이 질문은 가볍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 구원과 성품, 심판과 영원의 본질까지를 한꺼번에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자유란 언제나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과연 그것이 자유의 가장 높은 모습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목적은 인간에게 영원히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할 권리를 보존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여, 마침내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죄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빼앗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유를 치유하고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론
2. 사랑은 강요될 수 없기에 자유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신 이유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습니다. 강요된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선택할 수 없어서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작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나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랑을 거절할 수도 있는 인격적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창세기 1장 27절
자유는 사랑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토양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유는 그 자체가 구원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목적에 이르기 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거절할 가능성과 씨름하도록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받아들이고, 살아 내며, 마침내 사랑이 우리의 성품이 되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는 출발점입니다.사랑은 목적지입니다.
그리고 이 출발점과 목적지 사이에는 성품의 형성이라는 긴 여정이 놓여 있습니다.
3. 우리는 선택을 하지만, 선택은 다시 우리를 만듭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의 선택을 만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선택들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성품을 만들며, 성품은 마침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모든 선택은 마치 마음의 비탈을 따라 흐르는 빗물과도 같습니다. 처음 한 번의 선택은 작은 흔적만을 남깁니다.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물이 계속 흐르면 골이 생기고, 그 골은 점점 깊어집니다. 마침내 물은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 흐르게 됩니다.
거짓말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불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작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고 느끼면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더 자주, 더 능숙하게, 더 대담하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그 사람은 단순히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실을 말하는 선택도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며, 책임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선택하는 일이 반복되면 정직은 더 이상 힘겨운 행위로만 남지 않습니다. 정직이 그 사람의 성품이 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방식으로 증언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 6장 16절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의 종이 됩니다. 선택은 단순히 외부의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7절
우리가 거두는 것은 단지 행동의 결과만이 아닙니다. 그 행동을 반복하며 형성된 우리 자신도 거두게 됩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누가복음 6장 45절
사람의 행동은 우연히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오랫동안 쌓여 온 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외부에서 억누르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구원은 행동을 만들어 내는 마음의 원천이 치유되는 일입니다.
4. 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의 자유는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가장 자유로운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배우자를 배신할 것인지, 배우자에 충실할 것인지를 두고 매일 극심하게 갈등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형식적으로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욕망과 두려움, 죄책감과 자기기만에 찢겨 있습니다.
반면 배우자를 깊이 사랑하여 배신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충실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날마다 고통스럽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랑과 성품이 이미 방향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둘 중 누가 더 자유롭습니까?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되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기쁘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자유롭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자유의 표현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한복음 8장 34절
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자유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처음에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욕망이 되고, 욕망은 습관이 되며, 습관은 속박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장 36절
성경에서 참된 자유는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을 자유,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 디도서 1장 2절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 2장 13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유롭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완전하게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것은 외부의 법이 하나님을 억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진실하고 신실하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자유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원하지 않을 만큼 선한 성품을 지닌 것은 오히려 자유의 완성일 수 있습니다.
5. 자유의지는 목적지가 아니라 성숙을 위한 길입니다
신학과 철학에서는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흔히 ‘자유의지적 자유’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자신의 성품에 따라 기쁘게 행동하는 자유를 ‘성품과 조화를 이루는 자유’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린 단계의 자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숙한 자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선택한다.”
처음에는 선을 선택하기 위해 갈등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진실과 사랑을 계속 선택하면, 우리는 단지 사랑이라는 행동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목적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고린도후서 3장 18절
복음은 우리를 법적으로만 용서받은 사람으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죄인이 천국의 문을 어렵사리 겨우 통과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치유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 상태에서 인간은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병적으로 갈라져 있던 의지가 하나로 통합됩니다.
자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병이 사라지는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조하고, 관계하며, 사랑을 표현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을 자유라고 착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6. 천국에서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천국에서 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외적으로 통제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감시가 너무 철저하여 아무도 죄를 실행하지 못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죄를 원하는 마음 자체가 치유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새 창조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요한계시록 21장 27절
이 말씀은 천국의 입구에 강력한 보안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뜻을 훨씬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짓과 폭력과 자기중심성에 기초한 질서와 양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새 창조에 들어가는 사람은 억지로 죄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추하고 파괴적인지를 온전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죄를 선택하고 싶지만 금지당한 사람이 아니라, 죄에서 완전히 치유되어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히브리서 12장 23절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한일서 3장 2절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온전히 알게 된 사람에게 죄는 더 이상 매력적인 대안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뇌가 아닙니다. 진실을 온전히 본 의식의 해방입니다.
어두운 방에서 밧줄을 뱀으로 오인하던 사람이 빛이 들어오자 그것이 밧줄임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제 밧줄을 뱀이라고 믿을 ‘자유’를 잃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오류에서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새 창조에서 인간은 죄를 선으로 착각하거나, 자기중심성을 자유로 오해하거나, 하나님 없는 삶을 행복으로 오인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선택이 제거된 곳이 아니라, 모든 기만이 제거된 곳입니다.
7. 사랑의 성품은 획일성이 아니라 무한한 창조성을 낳습니다
죄를 선택할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해서 인간의 개성과 창조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는 하나의 형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노래가 되기도 하고, 침묵이 되기도 하며, 섬김과 환대와 지혜와 유머와 예술과 탐구가 되기도 합니다.
완전하게 충실한 남편이라 하더라도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습니다. 따뜻한 말로 사랑할 수도 있고, 함께 걷거나 식사를 준비하거나 아픔을 묵묵히 견뎌 주는 방식으로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불륜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자유가 빈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배신이라는 파괴적 가능성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를 이루지만 서로 똑같은 존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획일적인 복제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각 사람의 고유성을 회복하고, 죄가 훼손했던 개성과 재능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꽃피게 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증오를 표현할 자유는 없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파괴할 자유는 없지만, 창조하고 돌보고 기뻐하며 교제할 자유가 있습니다.
죄의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무채색의 단조로움이 아니라, 사랑의 무한한 다양성이 시작됩니다.
8. 하나님의 심판은 성품의 진실을 드러내고 치유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완성된 상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성품은 어떻게 다루어집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천국과 지옥의 명단을 나누는 행정 절차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심판은 인간 존재의 진실이 하나님의 빛 앞에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3장 13절
하나님의 불은 무지한 분노의 불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을 태우고 진실을 드러내는 거룩한 사랑의 불입니다.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린도전서 3장 15절
심판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눈물을 무시하거나 가해자의 책임을 지워 버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은폐와 자기기만을 벗겨 내고, 우리가 선택한 삶의 실체를 온전히 마주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실을 드러내시는 목적은 단순한 복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파괴하여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상처 입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심판과 치유는 우리의 왜곡된 성품을 진리 앞에 세우고, 사랑과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제거합니다. 그 과정의 방식과 범위를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기계적으로 천국에 집어넣지 않으시며, 아무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9. 끝까지 사랑을 거부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일입니다
성품이 사랑 안에서 굳어질 수 있다면, 반대 방향으로도 굳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악을 사랑하는 괴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빛을 거부하고, 진실을 억누르고, 타인을 도구로 사용하며, 자기중심성을 반복적으로 선택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 자체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택하지만, 마침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지만, 지속적인 거절 끝에는 하나님을 원할 능력마저 상실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의 종착지를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5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최종 결과는 하나님께서 끝없이 고문을 가하시는 삶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맞이하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방의 거부를 폭력으로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끝까지 부르시고, 설득하시고, 품으시고, 치유하려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인격의 최종적인 결정까지를 강제로 사랑으로 바꾸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이 죄의 가장 무서운 비극입니다.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중단하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닫아 버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에스겔 33장 11절
멸망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호소를 끝까지 거부한 죄가 낳는 최종적 열매입니다.
10. 십자가의 복음은 용서만이 아니라 성품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대한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성품 형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가 선한 성품을 쌓아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수련으로 구원을 획득하라는 소식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디도서 3장 5절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원수 된 우리를 화해시키셨으며, 정죄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장 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상태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복음의 은혜는 죄를 눈감아 주는 값싼 면허 같은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능력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셨으니.”— 디도서 2장 11~12절
우리는 선한 성품을 만들어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새로운 성품으로 빚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증명하려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렸기 때문에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장 13절
그러므로 성품 형성은 인간의 자력 구원과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11. 교회의 비극은 올바른 주장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분리한 데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구원을 올바른 교리를 믿고, 올바른 집단에 속하며, 올바른 종교적 문장을 고백하는 문제로 축소해 왔습니다. 물론 진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진리가 삶과 성품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아직 복음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물으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20절
바울도 모든 신비와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13장 2절
그리스도인의 가장 확실한 표지는 논쟁에서 승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약자를 품으며, 진실을 말하고,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짊어지는 성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장 35절
하나님의 나라의 거대한 계획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특정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사람들, 곧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실함을 닮은 백성을 빚고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가 올바른 교리와 입장만을 강조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성품을 잃는다면, 복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놓친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리 정확한 말을 하더라도, 우리의 태도와 관계와 삶이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왜곡하여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관해 올바른 설명을 반복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자기희생적 사랑이 우리의 말과 관계와 권력 사용과 삶의 방식 속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12. 오늘의 작은 선택이 영원을 연습합니다
천국에서 죄가 다시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은 먼 미래에 관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사실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내리는 작은 선택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미움을 품을 것인지 용서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불리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것인지, 약한 사람을 이용할 것인지 보호할 것인지, 자신의 체면을 지킬 것인지 잘못을 인정할 것인지, 상처를 되갚을 것인지 하나님께 맡길 것인지가 우리의 성품을 형성합니다.
우리는 매일 영원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실패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으며, 때로는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회개란 단지 잘못한 행동을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사랑 쪽으로 다시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 전환이 반복될수록 우리 안에 새로운 길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미움이 자연스러웠지만 점차 용서가 가능해지고, 이전에는 자기방어가 먼저였지만 점차 진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며, 이전에는 자신만 보였지만 점차 다른 사람의 고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변화는 느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더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시는 길도 아니며, 우리 힘만으로 자신을 고치는 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손을 내미시고, 우리의 자유가 그 손을 붙잡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길입니다.
결론
13. 완성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 곳
천국에서 인간에게 자유가 남아 있다면 다시 죄가 시작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이제는 답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죄가 다시 시작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의지가 제거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가 마침내 온전히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속박하던 죄를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기계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를 온 마음으로 원하는 사람으로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은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성품이 됩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서 성품이 완성될 때, 우리는 단지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아름답고 선하며 생명을 주는 분이 없음을 온 존재로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죄를 지을 자유를 잃어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약속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고, 그 거짓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집니다.
천국은 자유가 사라진 감옥이 아닙니다.
천국은 자유가 사랑 안에서 완성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것입니다. 사랑을 수천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새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섬기며, 창조의 무한한 신비를 탐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은 생명과 진실과 사랑의 방향으로 흐를 것입니다.
그곳에는 다시 사망이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아무도 거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다시 고통이 없습니다. 아무도 다른 존재를 이용하거나 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다시 죄가 없습니다.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거짓과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을 간직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유롭게 사랑을 배우고, 사랑 안에서 자라며,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장 4~5절
그날에 우리의 자유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에야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