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 존재를 넘어서,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 ―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께,
이 글은 단지 고인이 남긴 질문에 대한 응답이 아닙니다.
이 글은 하나님을 몰라 눈물짓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보내는 절박한 편지입니다.
고(故) 이병철 회장이 생의 끝자락에서 던진 질문,
“신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는
지성의 탐구가 아니라,
침묵하는 하늘을 향해 외친 고통의 절규였고,
사랑을 갈망하는 한 인간의 마지막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이 질문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Ⅰ. 존재를 묻는 질문은, 사랑을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합니까?
단순히 철학적 궁금증 때문입니까?
아니면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싶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안아줄 존재가 있는가?”
인간은 철학적 동물이기 전에,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 사랑의 갈망이, 신을 향한 본능적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Ⅱ. 신은 어디 있는가?
― 왜 모든 문명의 근원엔 '신'이 존재하는가 ―
역사를 보십시오.
지구 어디에도 신을 부정하는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원시부족부터 그리스 철학, 인도, 이슬람, 유대교, 불교, 고대 마야까지,
모든 문화는, 크든 작든 ‘신적 존재’를 가정하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 안에 신을 향한 기억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사람 속에 보임이라… 그들이 핑계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19~20)
우주는 신의 ‘존재’만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질서’로 움직입니다 → 이는 지성의 흔적입니다.
*자연은 ‘조화’로 가득합니다 → 이는 관계의 구조입니다.
*생명은 ‘희생’으로 이어집니다 → 이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즉, 창조는 단지 신의 실존이 아니라, 신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Ⅲ. 그런데, 신은 왜 숨어 있는가?
이병철 회장처럼,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그토록 침묵하는가?”
“왜 눈앞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그 질문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 물음에는 신이란 존재는 강압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강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강제하지 않고,
사랑은 증명보다 ‘드러남’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폭력적 계시로 자신을 강요하지 않으셨고,
아들을 통해 자기 존재를 드러내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14)
신은, 인간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신은, 말씀이 아닌 살과 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존재는 결국 십자가에서 완전히 폭로됩니다.
Ⅳ. 십자가는 하나님의 존재가 아닌 그분의 ‘본질’을 드러낸다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전능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승리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침묵과 고통과 무기력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내어줍니다.
사랑은 철저히 낮아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감당하며, 죽기까지 책임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속죄 제물로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10)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이 글이 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의 고백처럼 다가가길 원합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 나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지금까지 논의한 전제 위에서,
우리는 이 땅의 수많은 ‘신 개념’을 뚫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영혼과 이성으로 깊이 조명해 보려 합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 간의 우열 논쟁이 아닙니다.
이 세계를 누가 창조했는가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며,
우리를 누가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Ⅴ. 모든 종교의 신들은 ‘강한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죽임당한 신’이십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말합니다.
“신은 강하다. 신은 위대하다. 신은 벌하신다.”
하지만 복음은 말합니다.
“신은 약하셨고, 신은 고난당하셨고, 신은 죽으셨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계시입니까?
그럼에도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2~24)
십자가의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강한 신’은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의 신’만이,
자기를 찌른 자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열어주십니다.
그 어떤 신도 원수를 위해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Ⅵ. 신의 존재는 결국, ‘그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신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려면,
그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십시오.
어떤 신은 복종을 요구합니다.
어떤 신은 희생 제물을 요구합니다.
어떤 신은 계율과 업적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5:15)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요한복음 13:34)
십자가의 하나님은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가 자유 안에서 응답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참된 존재만이
사랑으로 관계 맺고,
죽음으로 섬기며,
침묵으로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Ⅶ. “신은 존재하는가?”의 가장 정직한 해답은 “나는 그분을 사랑하는가?”입니다
신의 존재를 따지는 모든 질문은, 결국 나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는,
사실은 그 신에게 순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되 무관심한 자는,
그 신이 단지 나의 안녕을 위한 수단이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신 존재의 문제는 이성의 논증이 아니라, 사랑의 응답입니다.
신을 믿을 수 있는가?
그보다 먼저 묻습니다.
“너는 사랑을 믿는가?”
십자가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너와 함께 있다.”
Ⅷ. 결론: 십자가는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존재의 본질을 폭로한다.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신의 존재를 묻는 이 질문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을 건드리는 질문입니다.
신이 존재하는가?
예.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분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복음은 대답합니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너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은 지금도 너를 부르고 계신다.”
마지막 호소
고 이병철 회장이 묻던 그 질문 앞에,
지금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서 있습니다.
교회를 떠난 자들,
신을 저주한 자들,
끝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이 묻고 있습니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답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분은 존재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나는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없다.”
이 사랑이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오늘,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울리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