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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눈물로 다시 읽는 계시록>


― “계시록 연구의 이유, 복음과 십자가의 빛 아래 다시 묻습니다” ―


사랑하는 목사님께,

요한계시록 첫 강의를 통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목사님의 열정과 정성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어려운 시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려는 시도 자체가 귀하며, 그 진지한 열의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도 존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설레임 가운데 시작된 이번 강의를 따라가며 저는 복음 앞에서 깊은 탄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강의는 분명히 절박한 시대의 경고를 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 복음의 본질, 곧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심각하게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1. “속히 될 일”의 강조, 십자가 없이 예언만 남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이 “속히 될 일”을 보여주는 책이기에 연구해야 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하셨습니다. 계시록 1:1, 22:6–7, 22:10을 인용하시며, “이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구절을 중점적으로 언급하셨지요. 그러나 저는 진심으로 목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어떤 예언의 연대표입니까? 정치적 세력입니까? 종교개혁 이후 종파적 식별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구속하신 신부를 향한 애틋한 부르심입니까?

사랑하는 목사님, 요한계시록이 “속히 될 일”을 말한다면, 그 중심에는 반드시 “속히 오시겠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속히 오리라”(계 22:20)는 선언은 단순한 시간표가 아니라,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향해 다시 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맹세입니다. 십자가 없이 '속히 될 일'만을 강조한다면, 계시록은 공포의 지도가 되고, 성도는 사랑의 신부가 아닌 예언 해석의 수험생이 되고 맙니다.


2. “이단이 계시록에 집착한다”는 말, 자기 모순의 그림자를 던집니다

목사님은 강의 초반에 여러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에 집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천지, 전도관, 그리고 1992년 휴거론을 예로 드시며, 그들이 계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하셨지요. 저도 그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정중히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그 이단들과 목사님의 해석 방식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요?”

이단들은 계시록을 “예정된 역사적 사건의 시간표”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교리를 통해만 그 시간표를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죠. 그런데 목사님께서도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짐승들을 동일한 역사적 제국에 맞추시고, 종교 세력과 정치 세력을 특정하며,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구체적인 현실 정치와 연결하여 해석하십니다. 이 해석 방식은 외형만 다를 뿐, 동일한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시록은 종말의 지도를 알려주는 비밀 해독서다”라는 전제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해독이 아닙니다. 복음은 해방입니다. 십자가는 숨겨진 암호가 아니라, 벌거벗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계시록의 중심도 비밀 해석이 아니라,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바라보는 눈에 있습니다(계 5:6). 어린양을 잃어버린 예언 해석은 지식은 많지만 진리는 없습니다. 목사님의 강의에는 예언은 있었지만, 예수는 너무도 작았습니다.


3. 계시록 7복을 강조하셨지만, “복음의 시선”은 빠져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복(1:3, 14:13, 16:15, 19:9, 20:6, 22:7, 22:14)을 아주 정성껏 하나하나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들 역시 전통적인 행위 중심, 성취 중심, 신실한 노력 중심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계시록 22:14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의 피에 옷을 날마다 빠시라”고 권면하셨지만, 이 ‘빠는 행위’는 마치 내 신앙적 노력과 결단의 행위처럼 묘사되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더 나은 옷을 입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린양의 피로 씻겨진 새 옷을 선물로 입혀 주셨다”고 선포합니다(계 7:14).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결단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보혈에 항복한 자입니다. 그저 죄를 씻으려는 갈망조차 없는 자에게 주님의 손이 다가가 씻어주신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계시록의 일곱 복은 “잘해서 얻는 보상”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복은 보상 앞에 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회복의 시작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해석은 복을 예언의 수고를 통해 도달해야 할 정상처럼 설명하였고, 복음은 계단 아래로 내려와 십자가 앞에서 시작된다는 진리를 간과하였습니다.


4. 계시록 연구의 ‘율법화’는 오히려 복음을 가립니다

목사님께서는 반복하여 “이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킨다’는 말이 복음 안에서는 ‘율법적 의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에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어린양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며,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한 삶”(계 12:11)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강의에서는 이 ‘지킴’이 마치 종말을 대비하기 위한 신앙적 조건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듣고, 읽고, 깨닫고, 준비하고, 깨어있고, 옷을 입고... 이 모든 것이 “축복받기 위한 신앙행위의 조건”처럼 나열되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감격이 아닌 과제가 되어버렸고, 성도는 사랑에 빠진 신부가 아니라 시험 준비하는 수험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복음은 “무엇을 지켜야 복을 받을까?”가 아니라, “이미 내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지키신 주님께 복이 있다”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계시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킴’은 율법의 부담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압도된 자의 자발적 사랑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행위 중심의 경건은 결코 신부의 노래가 되지 못합니다.


5. 묵시는 ‘폭로’가 아닌 ‘위로’입니다 – 복음적 묵시 이해의 회복

목사님께서는 “계시”의 어원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를 설명하시며, “숨겨진 것을 드러내다”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이 설명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드러남’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빠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석학의 관건입니다.

계시록이 무엇을 드러내는가? 단순히 세상 역사의 시간표입니까? 이단을 분별하기 위한 정보입니까? 정치와 종교의 세력 구도입니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도 먼저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어린양이야말로 온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드러냅니다(계 5:6–14).

즉, 계시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라, “누가 참된 왕이신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고난받는 교회에게 지금도 왕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랑의 묵시입니다. 이 위로의 중심을 잃어버린 예언 해석은 지식은 많고 감동은 없고, 진리는 사라지고 공포만 남게 됩니다. 목사님의 강의는 묵시의 ‘정보성’은 강조했으나, 묵시의 ‘위로성’은 간과되었습니다. 계시록은 핍박받는 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덥는 책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어린양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위로의 책입니다.


6. 종말의 징조를 경고할수록, 우리는 ‘복음의 중심’을 더 분명히 외쳐야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세계적 기후 재앙, 바이러스, 경제 위기, 전쟁, 정치적 혼란 등을 들어 “때가 가까웠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이 역시 성경적 맥락에서 고려할 수 있는 관찰입니다. 그러나 제가 간절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종말의 때를 깨우는 진정한 메시지는 ‘징조’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에서도, 마지막까지 선포되어야 할 것은 징조의 분석이 아니라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셨습니다. 즉, 종말의 진짜 징조는 전쟁이나 기근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이 온 땅에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강의는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데 많은 분량을 쏟으시면서도, 정작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의 절박함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 강의는 무서운 예언을 해설해주는 종말 해석사무소처럼 들릴 위험이 큽니다. 성도들이 정말로 깨달아야 할 것은 “다가올 재앙”이 아니라, “이미 다 이루신 구속”입니다.


7. 요한계시록의 중심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 사랑의 복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 강의 마지막에서 계시록 19장,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언급하셨을 때, 저의 마음도 잠시 따뜻해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복음의 정점도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설명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옷을 제대로 입어야, 두루마기를 빨아야, 착실히 강의를 들어야, 그 청함에 응할 수 있다는 식의 조건적 복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반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랑에게 버림받아도 할 말 없는 신부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사랑이다”라고 부르시며,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신부를 초청하신 분이십니다(계 19:7, 호세아 2:19). 계시록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야 한다”는 경고의 외침이 아니라, “너는 이미 사랑받은 자다”라는 초청의 노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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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시록의 '구성'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우선순위의 전도

강의에서는 계시록의 '구조'를 매우 강조하시며, 1장 서론, 2–3장 교회들, 4–5장 하늘 장면, 6장부터의 심판 서사까지를 해석의 중심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런 서술은 학문적으로 체계적일 수 있지만, 복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시록의 ‘핵심’이 구조가 아니라 ‘인물’, 곧 죽임당하신 어린양(계 5:6) 이라는 사실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언의 구성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복음의 광휘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야 합니다.
계시록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선언하며, 이는 곧 구조 이전에 인격이 먼저이며,
시간표 이전에 십자가가 핵심임을 선포합니다.

구조적 계시록이 아닌, 속죄적 계시록,
심판 중심 계시록이 아닌, 어린양 중심 계시록이 되어야
복음에 합당한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2. 구조 중심 해석이 불러오는 인간 중심의 종말신학

목사님께서는 7인의 봉인, 7나팔, 7재앙의 구성을 반복·확대 구조로 설명하시며,
계시록은 종말적 사건이 단계적으로 심화되는 역사 예언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계시록의 문맥 안에서, 이 재앙들은 하나님이 주도하여 실행하시는 심판의 폭력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낳은 자기 파괴의 결과이며,
어린양의 희생 안에서 죄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의 절규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시록 6장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들’이나 16장의 재앙들조차,
하나님이 직접 분노의 도끼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랑의 하나님이, 자유를 존중하며 고통 속에 허용하시는 절규의 결과로 보아야
복음과 십자가의 일관된 신학이 됩니다.

그러나 본 강의에서의 해석은 이 땅의 고난과 파멸을
거룩한 심판의 전조로 정당화시키고 있기에,
복음이 들려주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3. ‘문맥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비껴간 hermeneutic의 한계

강의 중 목사님께서는 “계시록은 문자 그대로, 문맥 그대로, 구조적으로 해석해야 오류가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란 단지 글자의 배열이 아니라, 인격의 계시입니다.
‘정확한 구조 분석’은 복음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죽임당한 어린양”이 하나님의 뜻과 길과 중심(계 5:6–14) 이며,
그분의 속죄와 사랑이야말로 계시록 전체의 열쇠입니다.
그분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문맥을 따르고 구조를 쫓는다 한들,
우리는 계시록에서 ‘예수’를 놓치는 치명적 실수를 하게 됩니다.


4. ‘어린양 중심’ 해석의 부재가 초래하는 영적 방향 상실

계시록 5장은 온 우주의 구속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모든 창조물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찬송하며 엎드립니다.
이는 계시록의 시작점이자 해석의 핵심입니다.
그런데도 강의에서는 이 어린양의 눈물어린 영광이 단 한 차례도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계시록 13장의 짐승을 설명하면서도,
그 짐승을 이긴 자들(계 15:2)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그 어린양의 승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즉 칼이나 권세가 아닌 자기희생의 사랑이었다는 복음의 핵심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계시록이 다시 “강한 자의 심판 선언”으로 오해되고,
‘폭력적 정의’로 치환되는 위험이 생깁니다.


5. 계시록 속 심판은 ‘사랑의 비명’이지 ‘보복의 응징’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나팔, 대접, 재앙들이 단지 ‘심판의 단계’로 설명될 때,
그 메시지는 두려움과 위협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조차 사랑의 응답이 아닌 겁에 질린 복종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 6장에서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울부짖는 순교자들의 기도에,
하나님은 즉각 심판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잠시만 더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으시며(벧후 3:9),
심판보다 사랑을 선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6. 계시록의 진짜 시작점은 ‘구조’가 아닌 ‘십자가에서 흐른 사랑’입니다

계시록을 구조와 문맥, 상징과 예언의 시간표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결국 예수님을 기호 속에 가두고,
복음의 생명을 해석의 틀에 종속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이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느니라” (계 5:9–10)


바로 이것이 계시록의 시작점이며, 해석의 렌즈입니다.
그 피는 전쟁이 아닌 사랑에서 흘렀으며,
그 제사장직은 권세가 아닌 섬김과 중보의 십자가적 통치입니다.

이 십자가적 해석을 중심에 두지 않는 모든  계시록 강해는,
복음과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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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양의 피로 읽는 계시록, 예언 해석의 첫 단추를 다시 꿰며” ―


1. 예언 해석의 출발점은 ‘짐승의 정체’가 아니라, ‘어린양의 계시’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계시록 해석의 핵심을 “짐승의 정체와 연대기 예언 구조”에 둠으로써 시대별 배치와 역사적 대응관계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은 계시록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며,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종들에게 보이시려는 목적의 계시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의 첫 단추는 시대별 짐승 분석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입니다.

죽임 당한 어린양이 인을 떼는 것으로 시작되는 5~6장의 장면은, 계시록 전체 해석의 문을 여는 열쇠가 ‘어린양의 피’임을 명백히 증언합니다. 그런데도 예언의 해석을 짐승과 나라, 세력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성령이 성경에 계시하신 계시록의 구조적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계시록은 짐승의 정치 예언서가 아니라, 어린양의 사랑의 서사이며 복음의 절정입니다.


2. ‘전개 구조’가 아닌 ‘계시 구조’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입니다

강의에서 말씀하신 1장 서론, 2~11장 심판, 12~19장 최후 심판, 20~22장 영광이라는 전개 방식은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접근이지만, 이 구조는 예언의 점진적 계시에 담긴 ‘복음의 흐름’을 조명하기보다는 ‘심판 중심’의 도식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계시록 12장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라는 표현으로, 단순한 예언이 아닌 우주적 관점의 사랑 계시로 전환되는 분수령입니다. 용이 여자를 박해하되, 여자의 후손이 죽음으로 승리하는 방식으로 사단을 이긴다는 이 장면은, 계시록 전체의 영적 구조를 ‘십자가를 통한 승리’로 정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해석의 중심축은 ‘시대 분류’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써 사단의 고소를 이긴 복음의 흐름에 맞추어져야 마땅합니다(계 12:11).

이 흐름은 단지 종말의 정보나 세력 분석이 아니라, 우주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정당화되고, 구속이 완성되는 복음의 대서사입니다. 이 중심을 놓칠 때, 예언은 복음의 울림을 잃고, 신자들에게는 경외보다 두려움, 기쁨보다 의무감만을 남기게 됩니다.


3. ‘예언의 반복 구조’ 해석은, 어린양의 시선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사님은 강의에서 계시록의 구조를 "순차적 사건의 연속"으로 배열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단선적 서사가 아니라, 반복과 확대, 그리고 중심 회귀를 통해 동일한 복음 메시지를 점층적으로 펼쳐 보이는 복음의 파노라마입니다.

예를 들어,

7장의 14만4천과 14장의 14만4천은 동일한 공동체를 다른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6장의 종말적 진노와 16장의 일곱 대접은 유사한 ‘최종적 충돌’을 반복하며,

11장의 두 증인과 13장의 짐승과 싸우는 성도들, 그리고 20장의 순교자 부활은 모두 십자가를 따르는 증인들의 운명과 승리를 서로 다른 시각으로 비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짐승과 표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신호가 아니라, 계속해서 ‘죽임당한 어린양의 승리’를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서라는 초청입니다. 예언을 시대별로 정리하고 지식으로 분류하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예언의 복음적 심장을 잃어버리고, 교리화된 공포의 지도를 펼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4. ‘짐승의 정체 해석’이 복음을 가리게 되는 위험

목사님께서는 강의 내내 짐승이 무엇인지, 표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을 예언 해석의 핵심으로 삼으셨습니다. 물론 계시록은 짐승과 거짓 예언자, 큰 음녀, 바벨론과 같은 상징을 통해 악의 체계를 폭로합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성경이 짐승을 드러내는 이유는 짐승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이 어떻게 짐승을 이기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계시록 13장에 짐승이 등장하지만, 그 짐승을 진정으로 무너뜨리는 사건은 14장과 15장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 자들이 어린양과 함께 노래 부르는 장면입니다. 짐승의 세력을 이긴 자들은 전쟁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승리했습니다(계 12:11). 이 승리는 곧 ‘복음적 승리’입니다.

짐승의 정치적 정체, 종교적 세력, 종말적 징표에 집착하는 해석은, 교인들의 신앙을 성령의 감동이 아니라 정보와 공포에 기초하게 만들 위험이 큽니다. 짐승을 밝히느라, 어린양을 가리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5. 복음 중심 예언 해석은 ‘사랑에의 초청’이어야 합니다

계시록은 신자들에게 시대의 공포를 경고하기보다,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부름받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예언 해석의 최종 목적은 계시의 정확한 분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초대입니다.

계시록 22장의 마지막 외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계 22:17)


예언은 결국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해석의 구조가 아무리 정밀하고 예언의 연대가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그 해석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본래의 목적을 놓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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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언은 사랑의 편지였습니까?” –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중요성에 관하여


1. 요한계시록의 ‘중심축’은 재림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강의는 계시록의 중요성을 “예언의 정점”, “재림의 시기”와 같은 종말론적 흥미 요소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어린 양이 책을 취하여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다 함을 입었으니, 이는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음이라.” (계시록 5:9)


계시록의 중심에는 어린 양,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어린 양이 아니면 책은 열리지 않고, 그분의 피가 아니면 인류는 아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본 강의는 이 결정적인 구조를 무시한 채, 재림의 시기와 시대의 징조로 예언의 무게중심을 돌렸습니다. 이는 복음의 중심을 계시록의 외곽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2. “복음의 계시”가 아닌 “비밀 해석의 암호문”이 된 계시록

목사님은 강의에서 계시록을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시간표”로 이해하도록 이끄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사는 실제 역사 속에서 성취되며, 시간 안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미래를 예측하려는 인간의 지적 탐험을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닙니다.

계시록 1: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계시록은 그리스도의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책입니다. 그분은 사망을 이기신 어린 양이시고, 교회를 신부로 부르시는 사랑의 신랑이시며, 폭력이 아닌 자기희생으로 심판하시는 왕이십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강의에서는 계시록이 암호 해독의 도구, 시대 해석의 코드북, 재림 시점 계산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복음의 책이 아닌 공포의 수학책으로 만들어버리는 해석입니다.


3. 계시록은 사랑의 절정, 십자가의 감동으로 가야 합니다.

계시록은 “심판”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주체는, 원수까지 사랑하신 어린 양이시며, 불같은 눈으로 교회를 보시되 책망은 사랑 안에서 하시고, 칼은 혐오가 아닌 정결을 위한 도구로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본 강의에서는 계시록의 경고들을 두려움과 조급함의 동기로 전도와 순종을 유도하는 구조로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구조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사랑이고, 십자가는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사랑입니다.

계시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지막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책 속에서 십자가가 마지막으로 가장 깊고 눈부시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4. ‘시대주의 구조’의 결정적 오류 – 복음이 아니라 ‘신념의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본 강의에서 계시록을 시대별로 나누어, 각 시대가 특정한 교회와 사건에 해당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는 문자 그대로 아시아의 실재하는 교회들입니다. 물론 이 교회들이 교회의 유형들을 상징할 수는 있지만, 이를 강의처럼 교회사 전개 순서와 재림 전 역사 구도로 고정하는 것은 성경 본문이 허용하지 않는 과잉 해석입니다.

그런 해석은 결국 “지금은 라오디게아 시대니까 이러해야 한다”는 이념적 전제를 강화할 뿐, 오늘의 교회에게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작용하지 못합니다. 복음은 어떤 시대에도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이지, 시간표가 아닙니다.


5. “예언 해석”이 아니라 “사랑의 계시”입니다 – 상징을 코드화하는 위험성

목사님은 짐승, 뿔, 인, 표 등 계시록의 상징들을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들은 대부분 특정 세력(교황권, 미국, 중세교회 등)을 역사적 실체로 지정하여, 계시록을 ‘암호 해독’ 책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묻고 싶습니다. “어린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그 장면 속에서, 누구의 정체를 맞히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상징들은 모두 예수의 십자가에 이르는 고난, 사랑, 그리고 인내를 설명하는 그림언어입니다.

짐승의 숫자 666은 단지 어떤 제도적 세력의 코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권세, 자기 의, 강제력, 통제, 강압, 두려움에 뿌리를 둔 반복된 인간 제국의 상징입니다. 이 숫자를 특정 교황의 이름이나 라틴어 철자에서 찾아내는 작업은, 복음의 본질과 전혀 무관한 “사변”일 뿐입니다.


6. ‘예언 실현’ 중심 해석은 교회를 복음의 증인에서 ‘판독자’로 전락시킵니다.

목사님은 강의 중 계시록의 중요성을 “예언이 지금도 하나하나 성취되고 있다”는 방식으로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보여줘야 할 것은 예언이 얼마나 맞았는지가 아니라, 어린 양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계시록은 단순한 예언 실현의 리스트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신부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랑의 시입니다.
그런데 예언 성취를 중심에 두면, 교회는 세상의 역사 흐름을 맞추는 ‘해석 전문가 집단’이 될 뿐, 복음의 향기를 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7. 계시록은 ‘두려움’이 아니라 ‘눈물 씻김’의 책입니다.

강의 내내, 계시록의 경고와 심판은 반복적으로 ‘두려움’과 ‘준비’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말합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계 21:4)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두려워하라가 아니라 눈물을 닦아 주시겠다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계시록은 세상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 속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분은 심판의 불로 세상을 태우시는 분이 아니라, 불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세상의 잿더미 위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선언하시는 분입니다.


결어 – 계시록을 사랑의 편지로 회복하십시오.

목사님, 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향한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 편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부야, 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
너는 나의 것이고, 나는 너를 끝까지 기다릴 것이다.”


이 아름다운 초청을 ‘예언 성취’와 ‘공포’로 가로막지 말아 주십시오.
계시록은 해석하는 책이 아니라, 무릎 꿇고 읽는 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이렇게 초대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계 22:17)


계시록은 공포로 오게 하는 책이 아니라, 사랑에 감동하여 “목마른 자”가 “갑없이 생명수를 받게” 하는 책입니다.

부디 목사님의 계시록 해석이 ‘암호 해석의 도구’에서 ‘복음의 향기’로, ‘종말 경고의 책’에서 ‘사랑의 절정’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빚진 한 그리스도인이 올립니다.
  • ?
    벚꽃향기 16 시간 전
    복음 없는 계시록, 결국 예언 해석의 옷을 입은 율법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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