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없앨 수 있으며,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셔야만 했는가?”
사랑하는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고백이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절박한 해석입니다.
“왜 신만이 죄를 없앨 수 있는가?”
“왜 신은 그 죄를 없애기 위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죽어야만 했는가?”
이 질문의 핵심에는 인간에 대한 정직한 직관이 담겨 있습니다.
죄는 단지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붕괴이며,
그 존재 붕괴는 오직 창조주만이 되돌릴 수 있는 고통의 지점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신비를 함께 풀어가 보겠습니다.
1. 죄란 무엇인가? 죄는 행동이 아니라 ‘단절’이다.
우리가 흔히 ‘죄’를 어떤 나쁜 행동, 법 위반, 규칙 어김으로만 생각할 때,
“죄를 왜 신만이 없앨 수 있느냐”는 질문은 당연히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죄란 단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근본적 단절이며,
존재의 중심축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고, 존재의 근거이십니다.
그런데 죄는 그분과의 연결을 끊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겠다는 독립선언입니다.
죄는 결국 자기 존재를 자기 힘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교만한 분리이며,
그 분리는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죄는 단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부패이며,
하나님 없는 생명을 스스로 떠맡겠다는 ‘실패한 시도’입니다.
2. 죄는 인간의 손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 안에서 이미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든 자가 자기 스스로를 고칠 수 없듯,
죄에 빠진 존재는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죄는 ‘어떤 나쁜 행동’을 고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중심을 새롭게 창조하는 ‘새 생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생명의 근원, 존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그 단절된 존재를 다시 연결하고, 다시 빚고, 다시 숨 쉬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왜 “죄를 없앨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말이
도덕적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능력의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3.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죽어야만 하셨는가?
여기서 질문이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이 죄를 없앨 능력이 있다면,
굳이 인간처럼 오셔서, 고통스럽게, 창에 찔리고, 피 흘리고, 저주받으며 죽을 필요가 있었는가?”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존재 전체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죄는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그 단절된 자리에 ‘끝까지 함께 내려가는 연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죄값을 치른 법적 행위가 아니라,
죄에 빠진 인간과의 절대적 연합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죄인을 끌어안고 죄의 가장 깊은 자리,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까지 함께 내려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고통을 피해가며 구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고통을 함께 지며 구원합니다.
4. 십자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강제력’이 아니라 ‘자기 포기’임을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폭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처럼 약해지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위해 전능하신 분이 무력해지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때려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죄를 품어 없애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죽음은,
죄의 현실에 진정으로 연합하여
그 죄의 독을 그분의 존재 안에서 삼켜버리는 자기희생의 사건입니다.
5.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통을 통한 창조’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없애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불벼락도 아니었습니다.
그분 자신이 고통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단지 육체적 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의 실체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상태 전체를 끌어안으신 고통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이 고백은 절규입니다.
거룩하신 아들이 죄와 완전히 동일시되어
아버지와의 교제가 단절된 자리에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죄의 정체인 ‘하나님 없는 존재’의 고통과 죽음을
예수님은 온몸으로 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 죄와 죽음을 자기 안에서 끝내시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6.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의 구조를 붕괴시키는 방식이다.
죄는 두려움과 자기보호, 정죄, 복수심, 자기중심성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모든 죄의 뿌리를 폭로하고, 그 구조를 무너뜨립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용서하셨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끝까지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이 기도는 죄를 심판하는 칼이 아니라,
죄를 끌어안고 녹여버리는 불처럼 작용합니다.
죄는 사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죄는 보복에는 반응하지만, 자기희생 앞에서는 무너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구조 자체를 사랑으로 붕괴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죄를 안에서부터 녹여 없애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7. 왜 신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는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죄를 없애는 일은 신만이 하실 수 있는가?”
답은 이렇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그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위대한 사람도
이 단절을 메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하나님 없는 상태를 스스로 해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무게를 자기 안에 품고,
그 무게를 무한한 사랑으로 흡수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죽음인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대리 형벌이 아니라,
죄의 심연까지 들어오신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은 강제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덧붙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은 강제로 죄를 없애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소멸시키는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은 자유롭게 초대하는 사랑의 불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앞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죄됨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그 십자가의 품에 안길 때,
그 순간, 우리의 죄는
법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으로 녹아 없어집니다.
그 죄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 죄는 더 이상 내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죄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무지할 때, 반항할 때,
심지어 그 사랑을 조롱할 때조차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신만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는 이유는,
그분만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 죄의 심연에 자기 자신을 던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이,
오늘 우리 각자의 존재 안에서
죄를 녹이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길 기도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5
사랑하는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저는 참 오랜 시간 동안 이 질문을 붙들고 고민해왔습니다.
“왜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없앨 수 있으며, 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방식만이 그 죄를 소멸할 수 있었는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논리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답변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변은 분명 어느 정도 직관적으로 납득되고, 우리 마음에 감동과 빛을 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런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도, 100퍼센트 완벽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멈추자. 여기서부터는 설명이 아니라, 초대다.”
“이 길은 더 이상 논리로만 나아갈 수 없고, 신뢰와 사랑으로 건너야 할 다리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강제로 믿을 수밖에 없는 완벽한 논증”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순간, 사랑은 죽고, 자유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주시되,
믿지 않을 자유, 이유도 열어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논증 대신,
“충분히 납득 가능한 증거와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여지”를 함께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사랑과 진리 사이의 가장 위대한 균형을 세웁니다.
십자가는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치되,
그 외침은 검(劍)이 아니라 눈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은 우리의 논리적 승복이 아니라,
마음의 굴복과 사랑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믿음에는 언제나 리스크와 결단이 함께 갑니다.
바로 그 리스크 안에서,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유로운 인격적 만남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억지로 믿음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의 여지를 조용히 남겨놓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계시는 너무 약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크고 위대해서 감추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논리의 도구를 들고 다가가되,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 “네”라고 말하는 고백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설명될 수 있지만,
설명만으로 소유되진 않습니다.
십자가는 직관될 수 있지만,
직관만으로 체험되진 않습니다.
십자가는 결단 속에서만 진짜 생명이 됩니다.
그러니 오늘, 완벽한 논증이 아니더라도,
완전한 사랑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 사랑이 바로,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비친 그 십자가가
어쩌면 다 설명되지 않아도,
그 사랑이 마음에 와 닿았다면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은 논증이 아니라, 너를 위한 죽음으로 나타났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노라.”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