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는 유대 민족의 수호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안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선생님의 깊은 통찰과 학문적 고투에 대해 늘 경의를 표합니다. 이번 강의에서 선생님께서는 “야훼는 유대 민족의 수호신으로서 시작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런 전통적 신관으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 등장하는 전쟁, 보복, 민족 편향적 언어는 현대인의 윤리감정과 충돌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그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되, 십자가에서 자신을 다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야훼 하나님은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리시고, 복수를 중지시키시고, 자신의 적을 위하여 죽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셨기 때문입니다.
1. 『수호신 야훼론의 역사적 한계 – 성경도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을 오해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구약 성경의 초반부에는 하나님을 특정 민족의 편에 서는 ‘신’처럼 묘사하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출애굽기나 여호수아서,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진멸” 명령, “여호와의 군대”, “이방 민족 학살” 등은 하나님을 전쟁과 보복의 신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묘사들은 하나님의 본래 성품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의 신 개념에 맞춰 하나님을 인간의 이해로 왜곡해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류 없는 완전무결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본심이 인간의 왜곡된 그릇 속에 담긴 과정의 기록입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선생님의 지적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위험을 경계하는 신학자들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구약 성경의 폭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성과 경전에 투영된 결과다.”
2. 『‘종교의 진화론’으로 성경을 평가하는 결정적 오류』
선생님은 강의 내내 ‘종교 발전 3단계론’(애니미즘 → 유일신론 → 초월신/범신론)을 전제하고, 구약의 야훼 신앙은 초기적이고 미성숙한 단계에 불과하며, 궁극적 진리는 도교나 불교처럼 ‘무형의 신’ 또는 ‘초월적 원리’에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교의 발전적 구조는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자유를 철저히 무시한 철학적 투사일 뿐, 그 어떤 역사적·신학적 근거도 없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인간이 신을 발전시킨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낮추어 오신 계시의 역사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신’을 진보시켜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종교적 자부심과 도덕적 업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나타난 전혀 예기치 못한, 전복적인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이 곧 ‘야훼’시며, 복음의 본질입니다.
선생님의 주장처럼 “야훼는 유대의 원시신 개념이고, 더 높은 보편 종교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은, 마치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를 가리키며 “이건 구시대의 종교적 유물”이라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3. 『복음은 유대 민족신의 폐기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품으심의 완성이다』
성경은 야훼 하나님이 유대 민족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창 12:3)고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의 “선민사상”은 배타적 우월주의가 아니라, 복의 통로로서의 사명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잊고 배타의 종교로 퇴행하였고, 그 죄를 가장 깊이 심판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야훼 하나님을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하셨고, 야훼 하나님의 마음, 곧 사랑과 긍휼의 본질을 온몸으로 해석해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야훼는 유대인의 민족신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끌어안는 사랑의 아버지로 드러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4. 『진정한 계시는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 하나님을 올바로 보려면 예수를 보라』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이야말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계시라는 선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민족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며, 로마인과 유대인, 종교인과 죄인, 배신자와 군인 모두를 품으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더는 ‘유대인의 수호신’이 아닌, 모든 원수까지도 품으시는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야훼를 민족신으로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수호신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죽은 구속자요, 세상의 모든 장벽을 허무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5. 『야훼는 버려야 할 수호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선생님은 “야훼는 유대인의 수호신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초기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더 깊이 묻습니다.
그 야훼가, 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요?
왜 그 야훼는 원수를 사랑하라 명령하셨고, 심지어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셨을까요?
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정의하며, 그 사랑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입증하셨다고 기록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위한 전쟁신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자기희생의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야훼가 누구셨는지를 새롭게 보여주는 해석의 창이며, 하나님의 자기-재해석입니다.
6.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올바로 보게 되는 복음의 눈』
선생님의 말씀 중에는 “이제는 그런 하나님 개념을 버려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야훼”와 다른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 야훼가 본래 누구이셨는지를 드러내는 계시의 정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과거 인간들이 오해했던 하나님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야훼를 더 이상 민족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야훼가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야훼가 십자가 안에서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7. 『성경은 신의 고정관념이 아니라, 사랑의 드라마다』
선생님께서는 구약의 하나님을 ‘옛날식 신관’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신관 개념을 주장하는 철학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파란만장한 사랑 이야기, 다시 말해 인간의 오해 속에서도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끝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의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우리 방식대로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오해와 증오와 거절과 폭력을 다 끌어안고, 침묵 가운데 피 흘리심으로, 진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세상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관념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심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8. 『“하나님은 일상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 성육신과 십자가를 모독하는 주장』
선생님은 "하나님이 날씨, 전쟁, 기근, 질병 등 일상에 간섭하는 옛 신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우주 저편에 초월해 있는 개념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피눈물 속으로 들어오시는 살아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주목하시고(막 12:43), '병든 자의 침상 곁에 함께하며'(막 1:30–31), '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셨다'(마 10:30)고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일상에 침투합니다. 십자가는 역사와 시간 속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손길이며, 죄와 죽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개입하신 하나님의 자기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상사에 간섭하지 않는 존재’라는 주장은, 십자가 계시를 결정적으로 거부하는 철학이며, 인간을 외로운 고아로 만드는 위험한 신관입니다. 복음은 오히려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계 21:3–4)이라고.
9.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판단이 놓치는 것 – 복음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신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 8:12)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철학처럼 과거에 머무는 사유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존재를 꿰뚫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며, 억지 간섭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무한한 인내로, 깊은 침묵 속에서, 인류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회적 계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고대인의 야훼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도 현재도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신 사건이십니다.
10. 『이 시대가 정말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한 권력”입니다』
선생님의 비판은 종교 권력과 기복주의 신관에 대한 혜안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도구화한 권력들’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군림하지 않고, 섬기십니다.
명령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강요하지 않고, 초청하십니다.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세상은 몰랐고, 심지어 교회마저도 잊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 위에서 팔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11. 『그러므로 복음은 어떤 철학보다 더 높고, 십자가는 어떤 종교보다 더 깊다』
도교의 ‘무위자연’, 불교의 ‘공’, 유교의 ‘인’, 서구 철학의 ‘로고스’ 등은 인간의 사유가 도달하려 한 고귀한 사색의 열매들이며, 그 나름대로 시대와 인간에 기여해온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철학도, 스스로를 낮추어 피 흘리며 죽기까지 사랑한 하나님, 즉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수는 단지 깨달음을 전하는 성자가 아니라,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대속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추상적 초월자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시며,
그분의 복음은 철학의 체계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12. 『복음의 초청 – 철학이 가르치지 못한 사랑, 신학이 설명하지 못한 눈물』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학문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철학이 멈추고, 신학마저도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어떤 신관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이고,
그 어떤 윤리보다 더 강력한 것은,
그분이 원수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입니다.
장자는 인간의 욕망을 내려놓으라 가르치지만, 예수는 그 욕망을 지고 죽으셨습니다.
노자는 무위를 말하지만, 예수는 자기를 완전히 비움으로 무위의 사랑을 실현하셨습니다.
그분 안에서만, 철학이 말하지 못한 사랑이 터져 나옵니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가 버려야 할 신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결어]
선생님,
“야훼는 유대인의 수호신이다”라는 말은 인간이 만든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벽을 허무시고, 모든 철학의 경계를 넘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찢어 나눠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 어떤 해석도 침묵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봅니다.
주님은 여전히 부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과거의 수호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존경과 사랑을 담아,
복음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