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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림교단의 공식 입장: 왜 “2,300주야”의 기산점이 BC 2270년인가?“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3-14). 여기에 언급된 “2,300주야”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지속될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그것은 다니엘 시대 즉 페르시아 시대 이후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이 기간 안에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단 9:25) 예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때를 2,300주야의 종결시점으로 정하고, 2,3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식으로 계산하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해석이다.그와 같은 방식으로 2,300주야를 계산하는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AD 31년에 있었으므로 여기서 2,300년을 역산(逆算)하여 BC 2270년을 2,300주야의 기산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이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막연히 노아 시대라고만 말하고 있다. 노아 때의 홍수는 AM (창세 연대) 1656년에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족보와 연대를 자세히 계산하면 확실하게 나온다. 그러나 이 해가 서력기원(AD, BC)으로 몇 년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아일랜드의 감독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가 계산한 이른바 ‘어셔 연대’에 의하면, 천지 창조는 BC 4004년에, 노아 홍수는 BC 2348년(4004-1656=2348)에 있었다. 그렇다면 2,300주야의 기산점이라고 하는 BC 2270년은 홍수로부터 약 78년(2348-2270=78)이 지난 때이다. 홍수 때에 노아가 600세였으므로(창 7:6), 그 해는 노아가 678세 되던 해인데, 그 해를 특기할 만한 사건이나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2,300주야를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적용하면 성경 예언은 그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어셔 연대’가 그 당시에는 매우 정확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 후로 약 300년 동안 관용적(慣用的)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어셔의 연대 계산의 문제점과 성경 연대에 관한 새로운 연구로 인하여 ‘어셔 연대’는 이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어셔 연대’에 의지하여 특정한 연도를 지정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2,300주야에 관한 재림교회의 해석과 적용은 이미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확인되고 공인되었다. 그런데도 그런 연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맥과도 맞지 않는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으면 혼란만 야기할 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엘렌 G. 화잇 여사는 2,300주야의 기산점과 종결시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말했다.“2,300주야는 BC 457년 가을에 효력이 나타난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예루살렘 중건(重建)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계산하면 다니엘 9:25-27에 예언된 모든 사건들의 설명은 완전히 들어맞는다. … 그런데 1844년에 2,300주야에 관한 예언의 기간이 끝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되면 모든 문제는 혼란에 빠지고, 이미 예언의 성취로 확인된 증거까지도 무시되어 버린다.”(각 시대의 대쟁투,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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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성소 정결은 AD 1844가 아니라 골고다였다



먼저 성경을 사랑하시고, 예언을 탐구하시며, 성도들에게 분별의 지침을 주시려는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 헌신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귀한 열정이 복음의 중심에서 벗어나 숫자와 시간표에 갇힌 해석의 미궁으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비평의 글은 바로 그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사랑의 비평이며 간절한 복음적 요청입니다.



1. 예언을 복음으로 읽지 않는 해석: 숫자가 복음을 가리다


위의 재림교단의 입장은 본문(다니엘 8:13–14)의 “2,300주야”를 단호하게 역사적 시간표로 해석하며, 어떤 시점이 예언의 기산점인지를 밝히는 데 온 에너지를 집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BC 2270년” 기산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BC 457년–AD 1844년” 체계를 정통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수학과 연대기 속에 가두는 결정적인 신학적 환원을 동반합니다.


다니엘서의 2,300주야는 단순히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는 예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구속 약속입니다. 그리고 성소의 정결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죄가 도말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예언은 시간표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을 보십시오. 거기서 성소는 더 이상 예루살렘의 건물이 아닙니다. 성소는 하늘의 실체이며, 그곳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단번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 9:12). 이 십자가의 사건이야말로 성소 정결의 실현입니다. 그분이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시점은 AD 1844년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 직후이며, 그것은 “다 이루었다”는 하나님의 완성 선언으로써 확정되었습니다.


질문드립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까, 아니면 AD 1844년에야 완성되었습니까?



2. 사적 계시의 절대화: 복음을 능가한 권위?


위의 재림교단의 공식 입장에서는 “엘렌 화잇의 해석을 거부하면 예언 해석 전체가 무너진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이는 사실상, 성경 해석의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특정 인물의 사적 계시에 부여하는 매우 심각한 신학적 오류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십니다. 엘렌 화잇의 사역도 그 시대의 재림운동 안에서 선한 도구로 사용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적 계시는 결코 공적 계시인 성경을 대체하거나 넘어설 수 없습니다. 더욱이, 성경의 중심은 연대기적 예언 체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요한계시록 19:10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라”

— 곧, 모든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즉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흘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엘렌 화잇의 글이 이 증거를 향한다면 우리는 환영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예수보다 우위에 서서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처럼 작동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가리는 장애물입니다. 이 점에서 위의 재림교단의 주장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3. 기산점이 흔들리면 믿음이 무너지나?


“기산점이 흔들리면 예언 전체가 무너진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복음을 시간표 위에 세우는 위태로운 신앙 구조를 드러냅니다.


복음은 AD 1844년에 성취된 게 아닙니다. 복음은 골고다 언덕 위에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선언하셨고, 휘장은 찢어졌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길이 열렸습니다(히 10:20). 그 이후 어떤 역사적 해석도, 어떤 예언적 기산점도 이 사건을 더하거나 빼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어떤 사람이 AD 1844년이라는 연도에 신앙을 걸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계산에 기반한 신앙일 것입니다. 계산은 흔들릴 수 있지만, 십자가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시간표가 아니라 인격(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때에만 영원합니다.



4. 은혜의 신비를 방정식에 가두는 믿음의 왜곡


2300주야 예언을 둘러싼 이 논의에서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가 숫자와 방정식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산점을 찾고, 1년=1일의 공식으로 환산하고, BC 457부터 AD 1844까지 계산하며, 마치 숫자에 구속받는 하나님, 수학 공식에 따라 성소를 정결케 하시는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논리적 연산이 아니라, 피 흘림으로 선언된 하나님의 사랑의 현실입니다. 복음은 “정확히 맞는 계산”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은혜”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6절은 말합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여기에는 1844라는 숫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곧 “성소의 정결”, “죄의 도말”, “임재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왜 그 십자가 이후에도 다시 시간표를 세우고, 다시 숫자를 들이대고, 다시 조건을 계산하십니까?


정결함은 방정식이 아니라, 보혈의 현실입니다.

정결은 시간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선언입니다.



5. 예언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체제를 방어하는가?


위의 재림교단의 논지는 결국 이렇게 요약됩니다:


“457BC에서 시작된 2300년이 1844년에 도달했으며, 이 해석은 엘렌 화잇이 인정한 것이기에 절대적 진리이다. 이 구조가 무너지면 전체 교리도 무너진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전제를 암시합니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특정 교단의 구조를 드러낸다.


*복음의 본질은 십자가가 아니라, 교리의 정당성에 있다.


*회개와 정결함의 기준은 십자가가 아니라, 1844년 해석의 수용 여부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상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대체한, 구조의 하나님.

자기 비움의 예수님을 대체한, 체제 유지를 위한 예언 공식.

성소의 회복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성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실종되고 맙니다.


예언이 교회를 수호하기 위한 방패가 되어선 안 됩니다.

예언은 십자가의 진리를 드러내는 창이 되어야 합니다.

2300주야는 정통을 위한 연도가 아니라, 죄인을 위한 초청입니다.

예언의 시계는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6. 정결함은 무엇인가 – 성소 정결의 복음적 재정의


다니엘 8장 14절의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구약적 희생제사의 외형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실체로 성취됩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은 말합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정결함’은


1844년의 시간표가 아니라,


AD 31년의 골고다에서,


인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선언하신 “다 이루었다”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정결이란 무엇입니까?

정결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다시 오시는 사건입니다.

더 이상 장막 안에서, 건물 안에서, 교리 안에서 머무르지 않으시고,

바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로 삼으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요 14:23, 고전 3:16).


그리고 그 정결의 중심에는

율법의 증거판이 아니라,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흘리신 피가 놓여 있습니다.



7. 끝맺음: 정결의 시계는 멈췄고, 사랑은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성소는 정결케 되었노라.” (히 9:12)

“죄는 도말되었노라.” (히 10:17)

“사망을 이기었노라.” (고전 15:54)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 (요 1:14)



이 모든 선언은

어떤 시간표도 필요 없이,

오직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선포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확한 기산점’에 기대어 정결을 말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기계적 계산’에 의존하여 죄의 사함을 확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숫자로 구원받지 않았고,

교리로 정결해지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났습니다.



최종 결론


위의 재림교단의 논리는

견고해 보이나,

사랑이 빠졌기에

그 구조 전체가 진리의 집이 되지 못합니다.


십자가 없는 계산은 정결이 아니며,

피 흘림 없는 예언은 구속이 아닙니다.

정결은 시간표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1844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외치십시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이시로다.” (요 1:29)


2300주야는 끝났고,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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