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사라진 계시록》: 바벨론을 경고하다 복음을 잃어버리다
1.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 무기가 된 ‘최후 통첩’
김 선생님의 본 강의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의 기별’을 중심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고조시키며, 청중에게 ‘짐승의 표를 피하라’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복음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은혜로 인한 구원은 철저히 부재합니다.
그 결과, 강의 전반은 “구원의 기쁨”이 아닌 “종말의 공포”,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 “신적 협박”으로 청중의 영혼을 짓누릅니다. ‘최후의 통첩’은 복음을 위임받은 교회가 선포할 메시지가 아니라, 마치 심판 집행을 선고하는 전시 군사법정의 선포문처럼 들립니다.
*복음은 통첩이 아닙니다. 복음은 초청입니다.
*복음은 협박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희생의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을 반복하며 강조하면서도, 정작 십자가에서 그 진노를 대신 마신 어린양에 대한 복음적 메시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설교는 철저하게 복음이 제거된 종말론입니다. 복음을 잃은 종말론은 언제나 공포의 종교로 타락합니다. 청중은 구원의 감격이 아니라, 종말의 위기관리 매뉴얼을 암기하게 됩니다.
2. ‘짐승의 표’ 해석 – 율법주의의 극단이 된 종말 해석
김 선생님은 계시록 13장과 14장을 대비시키며 다음과 같이 단정합니다:
*짐승의 표는 일요일 예배
*하나님의 인은 토요일(안식일) 예배
*결국 “토요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 = 구원받는 144,000”
*“일요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 = 짐승에게 경배하고 멸망”
이와 같은 행위 중심의 이원적 구원 구조는 복음의 본질과 전면 충돌합니다.
(1)복음은 날이 아니라, 인격(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는 이유는 안식일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2)행위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면, 이는 전형적인 ‘율법+행위’ 구원론입니다.
신약은 명확히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3)하나님의 인이 ‘특정 요일 준수’로 축소될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을 무엇보다도 “성령의 인치심”(엡 1:13),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내적 보증”으로 말합니다.
“토요일 예배는 성경적, 일요일 예배는 바벨론의 짐승 경배”라고 단정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 전체를 바벨론화시키는 신학적 오만입니다.
이 해석은 그 자체로 구원에 관한 이단적 편협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토요일 의식행위에만 부여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오도합니다.
3. 144,000의 오해 – 상징인가, 선택된 엘리트인가?
김 선생님은 144,000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군대”, “진리를 지키는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로 강조합니다. 그 자체는 성경 본문과 조화를 이룰 수 있지만, 문제는 이 144,000을 극단적 분리주의와 선택주의의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44,000의 정결함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로 해석되며, 이를 “개신교 타락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로 단정합니다.
이들은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일요일 예배를 피한 자”로 제한됩니다.
즉, 구원은 “토요일 예배 + 교회 구조에의 소속 여부”로 결정된다는 구원 협소화가 일어납니다.
이는 계시록 본문의 상징성과 다양성에 대한 무시이며, 구원의 보편성을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계시록 7장과 14장의 144,000은 상징입니다. 이는 특정 종파의 자기동일화 도구가 아니라, 모든 세대에서 어린양을 따르는 참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복음은 한 민족, 한 교단, 한 예배일, 한 종파에만 속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합니다.
4. ‘하나님의 인’ = ‘안식일’? – 십자가를 지우는 계명주의
김 선생님은 하나님의 인을 곧 넷째 계명인 안식일 준수로 귀결시키며, 이를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왕의 도장에는 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이름, 직위, 영토. 넷째 계명은 모두 포함한다.”
“넷째 계명만이 하나님만이 명령할 수 있는 독특한 계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은 곧 안식일이다.”
이 신학적 구조는 성경 전체의 구원론과 심각하게 충돌합니다.
(1)신약은 안식일을 ‘인의 본질’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막 2:28), 바울은 “어떤 날을 지키는 것에 대해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롬 14:5–6, 골 2:16–17).
(2)십자가는 더 이상 ‘요일’로 구원을 분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은 율법적 구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부활로 증명된 사랑의 인입니다.
“너희가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또한 그 안에서 믿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1:13)
(3)‘요일’이 아니라 ‘성령’이 인침의 주체입니다.
요일을 강조한 나머지, 정작 하나님의 인치심의 실체이신 성령님은 설교 전체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임재를 체계적으로 누락한 해석입니다.
5. 바벨론 해석 – 교황권 중심 종말론의 오용
김 선생님은 계시록 14장과 18장을 연결하며, ‘큰 바벨론’을 단일 교단(천주교)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종말론에서 흔히 발생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위험한 단순화 오류를 반복합니다.
*첫째, 역사적 환원 오류
바벨론을 ‘로마 가톨릭 교회’로 단정한 것은 계시록 본문의 종말적 상징성을 역사적 단일 기관으로 고정시키는 해석 오류입니다. 계시록의 바벨론은 단순한 제도적 타락이 아니라, 신앙과 권력, 영성과 폭력이 결탁한 전 지구적 우상 체계를 상징합니다(계 17–18장). 이는 교황청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복음 왜곡 구조를 포함하는 넓은 범주의 상징입니다.
*둘째, 자기정당화 논리의 위험
김 선생님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름을 통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바벨론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참 교회로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고, 복음의 본질을 교단의 울타리로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남이 아니라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잊고 계명을 자랑할 때, 그 순간 교회는 바벨론이 됩니다.
*셋째, 복음의 본질적 왜곡
계시록 18장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는 부름은 단지 교파적 이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되돌아오라는 내면의 회개 부름입니다.
김 선생님의 바벨론 해석은 그 방향을 외형과 제도에 두고 있어, 복음의 개인적 회심과 내면 변화라는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6. 복음을 말하지 않고, 구원을 설교한다 – 신학의 중심축 붕괴
김 선생님의 설교에서 복음은 종종 ‘예수의 재림’, ‘계명을 지키는 삶’, ‘144,000의 충성’ 등으로 대체됩니다. 이 구조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신학적 붕괴를 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디에 있는가?
설교 전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대속, 자기희생, 죄인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거의 설교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복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짐승의 표를 피해야 한다”
“교황권과 타 교파에서 나와야 한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144,000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명령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복음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위대한 복음의 선언은, 김 선생님의 설교 전체에서 사라졌습니다.
*복음을 부차화한 ‘구원의 전제 조건화’
김 선생님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면서도, 안식일 준수, 개신교 출교, 교황권 경계, 144,000의 삶을 구원의 조건처럼 선포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구조를 행위 기준으로 다시 재설정하는 율법주의입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를 꾸짖은 바울의 경고와 동일한 문제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7. 세 천사의 기별 – 율법과 계시의 복음적 재해석 필요
김 선생님은 세 천사의 기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첫째 천사: 창조주를 경배하라 → 안식일 준수
(2)둘째 천사: 바벨론은 무너졌다 → 교황권 및 개신교의 타락
(3)셋째 천사: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 → 일요일 예배 거부
복음의 생명력을 잃은 이 해석은, 하나님의 사랑의 부름을 계명 중심의 경고로 바꿔버린 잘못된 접근입니다.
올바른 복음 중심 재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첫째 천사 – “창조주를 경배하라”
이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을 품으신 창조주를 다시 만나는 부르심입니다. 창조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고후 5:17). 창조주 경배는 단지 특정 요일이 아니라, 새 창조로의 삶(복음에 의한 재탄생)입니다.
<2>둘째 천사 – “바벨론이 무너졌다”
이는 역사적 교단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의 자기의, 자기구원, 자기교만의 구조가 무너져야 한다는 영적 선언입니다. 바벨론은 외부 구조가 아니라 십자가 없는 신앙의 내부 구조입니다.
<3>셋째 천사 –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
이는 교황이나 일요일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모든 우상적 권위와 자기 의지의 표를 거부하라는 복음적 초청입니다.
짐승의 표는 “사랑 없이 계명을 선포하는 자의 이마”에 먼저 찍힙니다.
8. 결론 – 복음은 율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김 선생님의 설교는 계명에 대한 경외, 시대의 징후에 대한 민감함, 그리고 회심의 긴박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의도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제거되고 율법이 주도권을 잡을 때, 설교는 생명이 아닌 저주의 복음, 공포의 언어, 자기 의의 시스템으로 전락합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복음은 안식일 이전에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은 144,000의 수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이름입니다.
*복음은 ‘바벨론에서 나오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마무리
김 선생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면서도, 계명을 주신 분의 마음,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모든 형벌을 대신 지신 사랑의 어린양을 선포하지 못합니다.
이 설교에서 진정 사라진 것은 ‘진리’가 아니라, 복음의 심장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바벨론은 일요일이 아닙니다. 바벨론은 예수 없이 안식일을 강조하는 설교입니다.
짐승의 표는 교황권이 아닙니다. 짐승의 표는 복음 없이 율법만 가르치는 신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