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애매함 ― 신앙은 사랑의 선택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천둥소리로 외치신다면,
“나는 여호와다! 지금 회개하라!”
그 순간, 인류는 모두 엎드릴 것입니다. 그 위엄과 광휘 앞에 감히 거역할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엎드림은 사랑의 반응이 아니라, 공포의 반사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이 아니라 본능적 생존의 몸짓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프로그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하시며, 또한 사랑받고 싶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유로운 존재, 즉 ‘아니오’라고 말할 수도 있는 존재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강제된 복종보다, 자유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을 감추시고, 인간이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다가올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셨습니다. 그 ‘여백’이 바로 신앙의 본질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1. “에피스테믹 거리” ― 믿을 만큼은 충분히 보이되, 믿지 않을 자유도 남겨두는 거리
이 신비로운 여백을 신학에서는 ‘에피스테믹 거리’(epistemic distance)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키지 않으심으로써, 인간이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십니다. 그분은 믿을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드러나시되, 믿지 않을 자유 또한 허락하십니다. 바로 그 여백이야말로 믿음이 자라나는 토양이며, 사랑이 자유로워지는 공간입니다.
이를 일상적인 관계로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진짜가 되려면 강요가 아닌 자발성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협박한다면, 그 사랑은 두려움의 복종일 뿐입니다. 연인의 사랑도 같습니다.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상대가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인형극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언제든 자신의 존재를 압도적으로 증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은 강요되는 순간 사라지고, 남는 것은 복종의 본능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부르셨기에, 믿을 자유와 거절할 자유를 동시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감춤과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감추심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지키십니다. 그분은 두려움을 이끌어내는 신이 아니라, 사랑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말구유의 아기 ― 강요하지 않는 사랑의 시작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불처럼, 폭풍처럼, 군림하는 왕처럼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품에 안겨 울었고, 젖을 먹었으며, 추위에 떨었습니다. 그분은 “두려움으로 복종하라”가 아니라, “나를 품고, 나를 사랑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 말구유의 장면은 단순한 성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온유한 계시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힘을 버리시고 연약함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심판의 칼 대신 초대의 눈빛으로, 왕좌 대신 말구유로. 그분은 우리를 강제로 무릎 꿇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무릎을 꿇고 우리의 눈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눈빛에는 명령이 아니라 신뢰가, 두려움이 아니라 기다림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기다림 속에서 사랑이 시작되고, 인류의 자유가 처음으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3. 십자가 ― 하나님의 ‘존재의 위압’을 버리고 ‘사랑의 무력함’으로 다가오신 자리
그러나 그 사랑은 말구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여정의 끝은 십자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의 위압으로 우리를 굴복시키셨다면, 그분은 하늘의 폭군처럼 군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의 권능이 아닌 인간의 약함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전능을 버리시고, 무력한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폭력 대신 희생을, 정복 대신 헌신을 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형벌의 도구가 아니라, “강요 대신 사랑을 택하신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힘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나는 너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한다.
네가 나를 거절할 수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위해 죽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번개로 외치지 않으시고, 피와 눈물로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의 침묵과 무력함은 절망의 표식이 아니라,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존재의 위압 대신 관계의 신뢰를 택하셨고, 통제 대신 자유를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강요도, 그 어떤 위압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나를 믿어라”라는 외침이 아니라, “내가 너를 믿는다”는 조용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억지로 꺾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꺾어 우리를 품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신적 확실성’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감추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관계의 여정’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증거의 길이 아니라, 신뢰의 길입니다. 사랑이 언제나 그렇듯, 믿음도 결코 계산이나 증명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순간, 이해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 진실이 드러납니다.
4. 일상의 신앙 ― 애매함 속에서 자라는 자유로운 사랑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이 질문은 모든 세대의 신앙인들이 품어온 가장 오래된 탄식이자,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사랑의 공간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분은 천둥이 아닌 속삭임으로, 번개가 아닌 눈빛으로 다가오십니다.
엘리야가 느꼈던 그 순간처럼, 하나님은 폭풍이나 불 가운데 계시지 않고 “세미한 소리” 속에서 말씀하십니다(왕상 19:12). 그 조용한 임재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배웁니다. 신앙은 명확한 확증을 쥐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뢰를 붙드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선택 속에서, 그분의 부드러운 부름에 응답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어떤 날은 그분이 멀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모든 것이 애매하게 흐려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애매함이야말로 사랑의 시험장이자, 믿음이 자라나는 토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보지 않고도 믿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분의 침묵 속에서 사랑을 붙들고, 확실성 대신 신뢰를 선택하는 그 고요한 결단이, 바로 신앙의 성숙입니다.
그 믿음은 확증이 아니라 관계의 신뢰에 뿌리를 두고, 증거가 아니라 사랑의 기억으로 버텨냅니다. 하나님은 때로 보이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사랑의 주체로 세우십니다. 그분은 “나를 찾으라” 하시며 감추시고, “문을 두드리라” 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이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단련되고, 사랑은 진짜가 됩니다.
5. 하나님의 침묵 ― 부재가 아닌 사랑의 신비
하나님의 침묵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가장 아픈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포기나 무관심이 아니라, 신뢰의 다른 얼굴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위해 잠시 손을 놓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한 발 물러서십니다. 그분은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 속에는 절제된 사랑의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길에서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은 이렇게 조용하신가?”라고 묻지만, 실상 그 조용함 안에 하나님의 가장 깊은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 속에서 사랑을 완성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항상 ‘애매함’이라는 신비한 공간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6. 결론 ― 사랑이 자유를 전제하듯, 신앙은 애매함을 전제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고백으로 모으면, 복음의 중심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이 사랑이 되기 위해 반드시 자유가 필요하듯, 믿음이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여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셨다면, 우리는 그분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확실성이 너무 커지면, 자유는 사라지고 사랑은 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확실성보다 신뢰를, 지식보다 사랑을, 통제보다 자유를 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존재의 위엄으로 우리를 압도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무력함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불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기로, 종으로, 십자가의 죄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과 약함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사랑이 비로소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를 위한 애매함”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사랑의 가장 깊은 언어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천둥이 아니라 속삭임으로,
이제는 번개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 조용한 사랑의 여백 속에서, 인간의 신앙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 믿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복종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 십자가의 고요한 빛 아래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애매함은 우리의 자유를 위한 가장 완전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아니함 같은 자여,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