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는 만들지 않는다, 발견된다 ― 복음이 전하는 존재의 진실”
리처드 도킨스 박사님께,
먼저 당신의 지성과 정직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은 꿰뚫는 논리로 인간의 도덕과 신념을 재해석했고, 수많은 이들에게 두려움 없는 사고의 자유를 선물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정직한 추구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의 논지 속에 감추어진 가장 심오한 갈증을 감지하며, 오늘도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박사님, 당신은 말합니다.
“인류는 신 없이도 선하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이 명제는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선언이자, 신 없는 윤리와 삶의 의미를 옹호하는 거대한 정신 운동의 기초입니다. 이 선언 속에는 교조적 종교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수많은 영혼의 울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단지 논박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항의가 아니라, 응답입니다. 논쟁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1. 도덕은 신 없이도 가능한가? — “왜 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피해갈 수 있는가?
박사님, 당신은 말합니다.
“인간은 공감, 이성, 진화된 사회성만으로도 도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맞습니다. 인간은 공감 능력을 타고났고, 진화론적 이타성도 관찰됩니다. 사회계약과 이성적 숙고를 통해 인간은 규범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사님, 여기에 한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왜 우리는 공감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이타적이어야만 합니까?”
“왜 생존에 유리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은 단순한 논리적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도덕의 ‘설명’과 ‘정당화(justification)’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가르는 물음입니다.
당신은 도덕의 ‘기원’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설명은 곧 정당화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라는 과학적 설명은 가능해도,
‘그래야 하는가?’, '옳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당위의 명령은 설명만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청년이 장애인을 조롱하며 웃고 있습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나쁘다’고 느낍니다. 왜일까요?
“공감의 부족이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화적 이타성을 위반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 만약 그 청년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공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공감을 느끼고 싶지도 않습니다. 진화 따위는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약한 자를 싫어합니다. 내 쾌락이 더 중요합니다.”
이 말 앞에서, 당신은 무엇으로 그를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감정도 진화의 산물이고, 그의 취향도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생겨났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그를 ‘비도덕적’이라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도덕의 무게입니다.
과학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말할 수 있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단순한 규범을 넘어선 한 인격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
그 사랑은 나를 넘어서서, 원수까지 포용하라고 부르시며,
그 근거는 논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진 하나님의 자기희생 안에 있습니다.
2. 북유럽 국가들은 신 없이도 도덕적이다? — 통계가 도덕의 기반을 대신할 수 있는가?
박사님, 당신은 말합니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등은 무신론 국가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회이다.”
예, 통계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의 기반은 통계가 아니라, 위기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어야 합니다.
이 나라들에 형성된 사회 시스템은 수백 년간 그리스도교 윤리, 루터교 신학, 공동체적 회개 운동 위에서 발전해온 것입니다. 복지 제도의 배경은 단순한 세속 합리주의가 아니라, “내 이웃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라는 신앙적 윤리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속적 도덕성은, 사실상 “도덕의 과실”만을 수확하며 “도덕의 뿌리”를 잘라내려는 시도입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는 걷어내고도, 열매는 계속 달리길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도킨스 박사님, 북유럽의 정점은 정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낙태율은 증가하고,
고독사율은 급증하고 있으며,
자살률은 여전히 OECD 최상위권입니다.
물질과 제도는 남았지만, 삶의 방향과 존재의 이유는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삶이 편해질수록, 인간은 더욱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과학은 침묵합니다.
3. 무신론에도 영성이 가능하다? — 그 ‘영성’은 결국 누구를 향해 열려 있는가?
박사님은 말합니다.
“명상, 감사, 평온, 경외… 이런 감정은 신 없이도 가능하다.”
맞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무한한 우주 앞에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대상 없는 경배”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향한 사랑인지 알 수 없는 사랑,
어디서 온 감동인지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은
결국 사라지는 찰나로 끝나기 쉽습니다.
기독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시되며, 십자가에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 말은 단지 초월적 명령이 아닙니다.
우리가 느끼는 경외의 감정을 “너를 향한 사랑의 대화”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질적 질문 하나 앞에 섰습니다.
“신 없이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
박사님은 말합니다.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예술, 과학, 공동체, 자연, 사랑… 그 자체로 충분히 깊은 의미를 줄 수 있다.”
저는 당신의 그 선언이 얼마나 많은 현대인에게 위로가 되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늘이 침묵할 때,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발명하고 세상에 목적을 부여하겠다는 그 마음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고귀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박사님, 그렇게 우리가 부여하고, 만든 “의미”가 정말 우리를 마지막까지 지탱할 수 있습니까?
3-1. 의미는 창조되는가, 발견되는가? — “누구를 위한 의미인가”라는 질문
도킨스 박사님,
“의미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은 현대 정신의 상징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거대한 모순이 하나 내재합니다.
“나는 나에게 의미를 준다”는 말은
결국 “내가 만든 것에 내가 감동한다”는 순환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쓴 소설의 결말에 내가 스스로 감동하며 “삶이 아름답다”고 선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름다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초월하지 못합니다.
의미란, 내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바깥에서, 나를 향해 존재하는 어떤 ‘부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 앞에서, 실존의 부재 앞에서
그 ‘의미’는 쉽게 붕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3-2. 고통 앞에서 의미는 무너진다 — “내가 만든 의미”는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가?
박사님, 제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은 괜찮았어요. 예술도 좋았고, 인간관계도 소중했어요.
그런데… 내 아이가 사고로 죽고 나니, 모든 의미가 무너졌어요.”
예술, 공동체, 자연은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랑하는 아들의 관 앞에서도 그것들이 의미로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박사님은 말합니다.
“삶은 원래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합니다.
“삶은 무의미하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셨다.”
― 그것은 곧,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복음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
‘나를 먼저 알아보고,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무너졌을 때, 가치가 없을 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사랑입니다. (이사야 43:1)
3-3. 무신론적 영성은 방향을 잃은 열망이다 — “경외함은 누구를 향해 열려 있는가?”
박사님은 말합니다.
“신 없이도 우리는 경외, 감사, 평온, 영성을 느낄 수 있다.”
예, 인간은 존재론적 열림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멈춰서고,
어떤 깊은 질서와 목적을 직관합니다.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 경외함은 누구를 향해 열려 있습니까?”
무신론은 그 열림을 ‘혼자서 감동하는 감정’으로 축소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 감동은 너를 부르고 있는 한 인격을 향한 응답이다.”
경외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대입니다.
자기보다 더 큰 존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여기 계십니까?”라고 묻는 영혼의 떨림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떨림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자리입니다.
“나는 여기 있다. 너를 위하여 죽은 나를 보라.”
3-4. 의미 없는 자유는, 결국 인간을 고립시킨다
박사님, 당신은 신이 없는 세계가 더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신이 없는 세계는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하고,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세계”입니다.
의미도 내가 만들어야 하고,
윤리도 내가 구성해야 하고,
고통도 내가 스스로 해석해야 하며,
죽음도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립입니다.
복음은 그 고립 속에 찾아오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복음의 의미는
“내가 만든 의미”가 아니라,
“나를 먼저 알아보고 불러주신 분의 사랑”에서 오는
선물의 의미입니다.
결론: 당신이 만든 의미를 넘어, 당신을 부른 사랑이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박사님,
당신은 말합니다.
“우리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말에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동시에, 숭고함도 있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인간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며
스스로에게 불을 밝히고, 혼자서라도 살아내려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박사님,
당신이 만든 그 불빛이 꺼졌을 때,
당신이 의미를 창조할 힘조차 남지 않았을 때,
그 어둠 속에서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고, 불러주며, 품어주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진짜라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의미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만들어낸 의미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감동은
“이미 누군가가 나를 의미 있다고 여긴다”는 진실입니다.
복음은 이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로마서 5:8)
당신이 무엇을 느끼든,
당신이 무엇을 믿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든,
그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내가 너를 알고 있으며,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박사님,
그 사랑 앞에서 더 이상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미 대답을 얻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네 삶은 의미가 있다.”
이 한 마디로, 인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지금 이 순간부터
그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진짜 자유이며,
그것이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는 길입니다.
(로마서 5:8 + 이사야 4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