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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신인가, 칼을 맞은 하나님인가>


리처드 도킨스 박사님께,

당신의 놀라운 지성과 집요한 합리정신 앞에 먼저 경의를 표합니다.
『The God Delusion : 만들어진 신』에서 당신은 "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가장 단호하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적 공격을 시도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신이 정면으로 겨냥한 대상은 단순한 유신론적 신 개념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 곧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전능하고 선하다’고 주장되는 존재였습니다.

당신의 비판은 결코 얕지 않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정도의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신이 있다면, 그는 가장 비열한 괴물"일 것이라 말하는 자입니다.
그 선언은 충격적이고 도발적이며, 동시에 많은 이들의 마음에 있는 숨겨진 분노를 대변합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당신의 이성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성과 영혼이 동시에 울리는 복음을 전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1. "구약의 하나님은 괴물이다"라는 선언 앞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아마도 허구의 존재들 중에서 가장 불쾌한 캐릭터다:
질투 많고, 자존심 강하고, 공정하지 못하고, 인종청소, 대량학살, 여성혐오, 자식 살해, 동물 학대 등을 일삼는 존재다.”


이 문장을 읽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방어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이 말 속에는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이런 신이라면 나는 사랑할 수 없다’는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슬픔에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복음이
십자가 위에 벌거벗겨져 죽은 바로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2. 당신의 질문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어째서 전능한 신이 ‘질투’를 느끼는가?
어째서 한 세대의 타락 때문에 지구 전체를 멸망시키는가?
어째서 젖먹이까지 죽이라는 명령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박사님,
이 질문들은 기독교의 심장을 찌르는 절박한 질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문제 앞에서 눈물 흘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피해자의 시선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은 신의 것이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이 명령을 들은 자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십시오.


3. 하나님이 진짜 전능한 괴물이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사님,
당신은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괴물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어떤 괴물이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수 있을까요?"

세계를 창조한 어떤 전능자가
자기 백성에게 배신당하고,
자기 손으로 만든 피조물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 매달린 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합니까?

괴물은 그렇게 죽지 않습니다.
괴물은 폭력을 명령하고, 두려움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갔습니다.

도킨스 박사님,
당신이 읽은 ‘구약의 하나님’이 그토록 괴물 같았다면,
왜 그분은 자기 권능을 내려놓고, 인간의 손에 매맞아 죽으셨을까요?

만약 당신의 말처럼 하나님이 자존심 많은 독재자였다면,
왜 스스로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의 죽음을 선택하셨을까요?


4. 성경은 ‘완벽한 신의 초상화’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신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가장 큰 오해는 이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며 도덕 기준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모습을 인간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인간의 왜곡과 폭력 안에까지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셨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폭력은
하나님의 본심이라기보다는,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저지른 폭력에
하나님이 스스로 몸을 담그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왜곡과 폭력 속에서 스스로를 가장 명확히 드러내신 결정적인 사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4-1. 노아의 홍수 – “감정 조절 실패”인가, 아니면 통곡하는 심판자인가?

당신은 노아의 홍수를
“신의 분노로 인한 전 지구적 대멸종”이라 비판하셨습니다.

“전능자가 감정에 휘둘려 지구 생명체들을 몰살한다? 이것은 도덕적 파산이다.”


그러나 박사님,
이 사건을 신의 폭발적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장을 찢는 슬픔으로 보면 어떻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땅 위에서 그들을 쓸어버리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6:6~7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분노로 으르렁대는 포악한 신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생명이 서로를 찢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는 세상을 보고
“마음 아파 우시는 창조주”로 등장합니다.

심판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이 깊기에 탄생한 고통스러운 절단입니다.

그것은 처벌이라기보다는
‘이대로 더 두면 안 된다’는 절박한 외침입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그 방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의 죄에 대해 외부에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인간이 되어 그 심판을 자기 몸에 짊어지신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4-2. 아브라함과 이삭 ― “심리적 학대”인가, 아니면 “종교의 죽음”인가?

당신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사건을
“신을 빙자한 도덕 파괴 실험”이라 비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는가?
이것을 ‘믿음’이라고 찬양하는 종교가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는가?”


박사님, 이 질문은 단지 합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깊은 절규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 저는 “그렇다”라고도, “아니다”라고도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성경이 이 장면을 통해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2)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3)그러나 마지막 순간, 하나님은 그 손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창세기 22:12


이 장면은 수천 년 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반전됩니다.

그 반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 로마서 8:32


박사님,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려 했지만,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기 아들을, 그것도 죄 없는 자를, 인간의 폭력과 불의 가운데 내어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들을 죽이라는 종교의 명령이 끊어지는 자리”입니다.
종교적 순종이 ‘희생’을 요구하던 시대를,
하나님이 ‘내 아들을 내주겠다’는 방식으로 종결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종교의 모순을 감싸 안아 자기 희생으로 끊는 이야기입니다.
이보다 더 깊은 윤리는 없습니다.


4-3. 여호수아의 전쟁 ― "전쟁 일지"인가, "비탄의 기록"인가?

당신은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을
“인종청소이자 전쟁범죄”라고 말합니다.

이 비판은 무겁고 정당합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도 이 문제 앞에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복음 중심 해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폭력의 기록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전쟁을 정당화한 비극의 기록이다.”


여호수아의 전쟁 서사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을 신성화하려는 인간의 시도에
하나님이 스스로 감추어져 들어가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감추어진 하나님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가나안 원주민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5:44).
그는 로마 병사에게 칼을 든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요 18:11).
그는 칼을 쓰지 않고, 칼에 맞아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결정적 해석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폭력을 정당화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을 자기 몸으로 감당하러 오셨다.”


5. 결론: 그분은 괴물이 아니라, 사랑의 상처를 지닌 아버지셨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박사님,
당신은 괴물을 보았고, 우리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구약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분노한 신을 읽었고,
우리는 그 폭력의 한복판에 침묵으로 걸어들어오신 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권능을 거두고
고통받는 자들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도킨스 박사님,
괴물은 칼을 들지만, 사랑은 칼을 맞습니다.
괴물은 두려움을 강요하지만, 사랑은 자기 생명을 내어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말합니다:
그는 전능한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폭력을 가슴에 껴안고 찢겨 죽은 사랑이셨다고.

만약 이것이 신의 이야기라면,
그 신은 당신이 두려워하고, 거부했던
포악한 지배자가 아니라,
당신이 가장 깊이 그리워했던,
“끝까지 함께 울어주는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 ?
    벚꽃향기 2025.07.21 00:33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
    (요한복음 1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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