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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못 박은 실재다”


유발 하라리 박사님께,

당신의 사고는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정직합니다.
인간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은 깊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상상 질서’, ‘공유된 픽션’, ‘사회적 실재’—
그 개념은 종교와 신, 문명 전반을 설명하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그 정교한 지성 너머에서
당신이 보지 못한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1. 당신의 통찰은 너무 정확해서… 너무 아픕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신은 허구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상상한 이야기다.”


맞습니다, 하라리 박사님.
수많은 종교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공포를 달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그 허구를 뚫고, 실제로 이 땅에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면요?
단지 인간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온 ‘이야기 자체’가 있다면요?


2.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죽임당한 신”

기독교는 허구를 통해 권력을 얻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허구적 권력의 구조를 박살낸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신이 인간처럼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 신은 제국도 아니었고, 권력자도 아니었고, 군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하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신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이 만든 허구입니까?


인간이 만든 신은 항상 강하고, 통제하고, 보상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고, 고통당하며, 자기 백성을 위해 죽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상상력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집단적 욕망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진화”가 설명하지 못하는 이야기

당신은 종교를 진화의 도구로 봅니다.
공동체 유지의 전략, 생존의 편의, 권력의 정당화.

그러나 질문합니다.

"십자가는 진화 전략입니까?"


자기 백성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아무런 정치적 힘도 없이 조롱당하고 죽는 것—

이것이 사회적 진화 전략으로 어떻게 설명됩니까?

진화는 생존을 위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생존이 아니라 ‘자발적 죽음’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입니다.


4. “허구”는 인간을 움직이지만, “사랑”은 존재를 뚫습니다

하라리 박사님,
허구는 인간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허구는 두려움과 욕망으로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자기를 위해 죽은 사랑에 사로잡힌 이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진화도, 심리도, 사회 구성 이론도
설명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힘입니다.

그 힘을 우리는 복음이라 부릅니다.




하라리 박사님,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백만 명이 동일한 허구를 믿을 때, 그것은 현실이 된다.”


그렇습니다.
국가, 법, 화폐, 기업, 제국, 심지어 많은 종교들까지도
‘공유된 상상’을 기반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다시 묻습니다.

“그 믿음이 현실을 만든다”는 말이
과연 “그 믿음이 진리이다”라는 뜻이 될 수 있을까요?


5. “화폐와 신앙은 같지 않습니다”

당신은 ‘화폐’와 ‘종교’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둘 다 실체는 없고,

사람들이 가치를 믿기 때문에 사회가 작동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화폐믿음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능체계입니다.
그러나 복음믿음을 통해 실재를 드러내는 계시체계입니다.


종이 지폐는 “이것이 돈이다”라는 믿음이 무너지면,
그 자체로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종이 조각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누가 믿든 안 믿든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실재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는
우리가 믿기 전에도 이미 존재하셨고,
믿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하시며,
믿는 순간 그 실재가 삶 전체를 뒤바꾸는 능력으로 임합니다.


6. “성령의 공동체는 세뇌가 아니라 생명의 탄생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허구를 믿을 때,
그 믿음이 질서와 통제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수단이 종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진심으로 경험한 사람은 압니다.
기독교는 ‘통제의 종교’가 아니라,
자유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기독교는 사람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 규범이나 종교 윤리가 아닙니다.
그 존재 전체를 바꾸는 거듭남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위협에 의해 변화하지 않고,
복음에 사로잡혀 자발적으로 변화합니다.


그 변화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상상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게 되며,
자기중심이 무너지고
십자가의 중심이 자기 안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집단 세뇌가 아니라
개인 존재의 구조적 붕괴와 재창조입니다.


7. “종교는 위안을 주지만, 복음은 생명을 줍니다”

하라리 박사님,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종교는 의미를 부여하고, 정신적 위안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라는 증거는 아니다.”


맞습니다.
많은 종교가 심리적 위안을 줍니다.
그러나 복음은 위안 그 이상을 줍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고, 절망을 뚫고 들어오는 생명입니다.

복음은 단지 “괜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고, 지금도 너를 위해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존재를 묻고,

죄를 직면하게 만들며,

회개를 요구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정교한 사회 시스템도,
심리학도, 인류학도
흉내 낼 수 없는 존재적 부활의 영역입니다.



하라리 박사님,

당신은 말했습니다.

“종교는 낯선 이들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진화적 도구다.”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신은 실재하지 않지만,
신에 대한 믿음은
사회를 조직하고, 생존을 유리하게 만들었기에 선택되었다.”


이 얼마나 치밀하고 논리적인 듯한 설명입니까.
그러나 그 설명은,
십자가 앞에서 단숨에 무너집니다.


7. “진화는 이타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진화를 배신합니다.”

하라리 박사님,
진화는 생존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음을 향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유전자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죽는 하나님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종교적 유용성이나
협력과 희생의 전략적 선택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진화는 ‘자손 번식’과 ‘유전자 보존’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자기 유익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이 사랑은 생존의 법칙이 아니라,
자기 부인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진화는 침묵해야 하고,
역사는 무릎 꿇어야 하며,
철학은 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8. “진화는 결과를 설명하지만, 복음은 근원을 폭로합니다”

하라리 박사님,
당신은 종교를
“협력, 복종, 희생의 제도화”로 보셨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인간의 도덕적 기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들어오신 초월적 존재의 자기 드러냄,
즉 계시(啓示)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하나님이 낮춰오신 것입니다.”


그 진실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선언이고,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폭로이며,
그럼에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자기를 죽음에 넘기셨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 진실은
사회적 협력을 이끄는 전략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해체하는 진실입니다.


9. “성령은 인간이 진화로 만들어낸 착각이 아닙니다”

박사님, 당신은 말했습니다:

“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측정되지 않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측정되지 않던 사랑이,
만져지고, 못 박히고, 찔리고, 죽고, 부활하여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상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현실을 꿰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누군가의 죄를 드러내고,
그 심령을 깨뜨리며,
눈물로 주를 찾게 만듭니다.

그 순간, 진화는 침묵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실재로 불붙습니다.


결론 ― “복음은 허구의 협력이 아니라, 존재의 해방입니다”

하라리 박사님,

종교가 상상된 질서일 수는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협력 구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며,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께서
직접 써내려가신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유된 착각이 아니라,
한 분의 실존적 헌신에서 시작된 역사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분은 이 편지를 읽는 당신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하라리야,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다.
너를 위한 내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못자국 난 손에 새겨진 실재다.”


그 손은 지금도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믿음은 허구가 아니라,
그 손을 잡는 길입니다.



박사님,

하나님은
우리의 집단 상상 속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무한을 찢고,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 위에서
너를 위해 존재를 부서뜨렸다.”


당신의 상상이 멈춘 그 자리에서,
그분의 사랑은 시작됩니다.

이 사랑이,
당신의 마지막 이론을 꿰뚫고
당신을 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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