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성경을 읽다가 마음속에 자꾸 걸리는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좀 조심스러운 질문이긴 한데, 정말 진심으로 고민이 되어 이렇게 나눠봅니다.
솔직히, 저는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만,
읽다 보면 정말 당황스럽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을 보고 나면,
그 말이 나중에 미국 남부에서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는 걸 떠올리게 됩니다.
또 어떤 구절들은 여성을 침묵시키거나,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여서,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마음일까?” 하는 의문이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시라면,
왜 굳이 그런 식의 말들이 성경 안에 포함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런 말들이 나중에 잘못 해석되거나 악용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그런 구절들을 그대로 남겨두신 걸까요?
누군가는 말하길, “그건 다 하나님의 뜻이니 의심하지 말라”고도 하지만,
솔직히 저는 그런 식의 대답은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줍니다.
만약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왜 어떤 부분은 그렇게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쓰였을까요?
혹시 이것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나, 복음적인 관점에서의 설명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왜 그런 본문들조차 성경 안에 남기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진심을 다해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처럼 이런 문제로 신앙 안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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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빛으로 성경을 다시 읽다〉
― 폭력의 본문 속에 숨은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서
1. 피 묻은 본문 앞에 멈춰 선 질문
성경을 진지하게 보는 누구나 언젠가 이런 질문 앞에 멈춥니다.
“왜 하나님은 성경에 그렇게 오해되기 쉬운 구절들을 남기셨을까?”
“왜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어, 미국 남부의 노예주들이 하나님을 핑계로 채찍을 휘두르게 하셨는가?”
“왜 여성을 억압하고, 아이들을 방치하며, 전쟁과 진멸을 명령하는 듯한 본문이 성경 속에 그대로 살아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해석학적 탐구를 넘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처 입은 이들의 한숨과, 피, 눈물이 녹아 있는 외침입니다.
그 누구도 이 질문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더 이상 말이 되지 못하고 멈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모든 억압과 왜곡, 그리고 그 왜곡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고통의 무게를 내 몸에 짊어졌다.
나는 그 폭력의 정점에서, 그 거짓 계시의 심연에서, 너희를 대신해 죽었다.”
2.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성품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완벽한 신의 계시 문서’로 상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자들의 손을 붙잡고 글자를 하나하나 받아적게 하셨고,
그래서 한 글자도 오류 없이 무오하며, 바로 그 말씀이 하나님의 본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 성경은 그렇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인간의 언어, 문화, 시간 속의 사람들 안에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와 역사에는 편견과 폭력, 오해와 왜곡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분은 강제로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다립니다.
사랑은 자기를 낮추며, 심지어 오해당하면서도 상대의 성장 속에서 동행합니다.
3. 하나님은 자기 자신조차 오해받도록 내어주신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에서 노예제를 묵인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여성을 침묵하게 하는 율법을 보고,
하나님이 마치 전쟁을 즐기시는 듯한 장면들 앞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본문들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 문화와 세계 속에서 ‘견디신 흔적’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적인 시대와 동행하시되,
그 시대를 단번에 혁파하지 않으시고,
조금씩, 점진적으로, 자발적인 사랑의 방식으로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조차 오해받도록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강제로 이해시키는 것보다, 사랑으로 깨닫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경 해석의 중심 기준이 된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성경의 ‘문제적 구절들’을 해석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단 하나입니다.
십자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가장 완전하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신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죽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그분은 스스로 무력해지셨고,
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쓰러짐으로 악을 삼키셨습니다.
그분이 골고다 언덕에서 하신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본문을,
십자가의 하나님이라는 ‘해석의 중심’으로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5. 성경은 ‘로르샤흐 테스트’다
―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기보다, 종종 자기 자신을 본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뜻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거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읽는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성경에 투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일종의 로르샤흐 테스트(Rorschach test)와 같습니다.
잉크 얼룩의 모양이 고정되어 있듯이, 성경 본문도 고정된 문장이지만,
사람마다 전혀 다른 해석과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어떤 이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무기로 사용해 여성을 억압합니다.
또 어떤 이는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현대의 노동 착취를 정당화합니다.
누군가는 구약의 전쟁 명령을 끌어와 현대의 폭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싸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해석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누구도, 어떤 이념도, 어떤 권력도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자, 완전한 폭력 거부입니다.
그분은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셨고, 가해자의 칼날을 대신 맞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계층 구조를 무너뜨리고, 모든 지배욕과 정복의 논리를 폐기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자기를 변호할 수 없고,
자기 확신을 주장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를 해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해석자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심판대이자,
무너진 우리를 사랑으로 다시 세우는 부활의 자리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나는 성경을 통해 누구를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그 안에서 내 확신과 입장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성경은 나에게 철저히 왜곡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얼굴을 중심에 두고 성경을 다시 읽는다면,
그 성경은 나를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됩니다.
6. 십자가는 우리의 확증 편향을 무너뜨린다
― 성경은 나를 정당화하는 책이 아니라, 나를 해체하고 새롭게 하는 책이다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보다, 우리 마음속 욕망과 두려움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성경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미 믿고 싶은 것을 가지고 성경에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구절만 찾아내어 강조하고, 그와 다른 구절은 무시하거나 축소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덧칠하는 붓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모든 자기 확신을 해체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력함을 드러낸 자리이며, 어떤 인간적 자랑이나 이념도 정당화되지 않는 사랑의 심판대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옳고 싶으냐? 그렇다면 먼저 네 자아가 죽어야 한다.”
“네가 가진 신념이 복음과 같다고 주장하느냐? 그렇다면 그 신념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라.”
“네가 의지하는 해석, 학문, 전통, 교단, 권위, 정치, 이념이 참되다 믿느냐? 그렇다면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죽임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드러난 하나님 앞에서 다시 검토하라.”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성경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도,
성경을 자기확신의 방패로 삼는 자도,
심지어 '복음주의자'조차도.
왜냐하면 복음은 내가 옳음을 주장할 권리마저 십자가에 못박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칼이 아닙니다. 사람을 찌르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못입니다. 자기 자신을 못 박는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깃발이 아닙니다. 이념을 상징하는 승리의 표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찢긴 몸입니다. 스스로 깨지고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육신입니다.
십자가는 전쟁의 함성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은 자의 울부짖음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진리를 듣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찌르되 정죄가 아닌 사랑으로 찌르고, 우리를 해체하되 파괴가 아닌 부활로 세우며, 우리를 무릎 꿇게 하되 굴욕이 아닌 자유로 이끕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안의 확증 편향을 부수고, 우리 존재 전체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복음의 산고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왜 성경의 중심이 반드시 십자가여야 하며, 성경 해석의 최종 기준이 '죽임당한 어린양'이신 하나님이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7. 결국, 왜 그런 구절들이 허용되었는가?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본문들을 성경에 남기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강제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조차 오해받도록 허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계시하시며, 우리를 존중하시는 방식으로 진리를 열어 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오해와 고통과 피를 자기 몸에 흡수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그 모든 왜곡과 고통을 하나님이 어떻게 끌어안으셨는지를 보여주는 최종 계시입니다.
결론 ― 십자가는 해석의 중심, 사랑은 해석의 기준
―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두 갈래의 길 앞에 서게 됩니다.
한 길은,
내가 이미 믿고 있는 것,
내가 이미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이미 붙잡고 있는 권리와 입장을
성경을 통해 정당화하려는 길입니다.
이 길은
내가 속한 집단의 우월을 강화하고,
나의 신념을 확신으로 고착시키며,
타인을 정죄하고 내 논리를 방어하는 데 성경을 사용합니다.
이 길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며, 침묵시키는 데 이르게 됩니다.
죽임을 정당화하는 성경 읽기.
다른 한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다시 읽는 길입니다.
이 길은
내가 가진 해석이 무너지고,
내가 의지하던 신념이 흔들리고,
내가 숨기던 자기중심적 종교심이 드러나는 아픈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죽임을 당할 준비가 된 자만이 걷는 길,
그리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땅에서 무엇을 살아야 하는지.
왜냐하면,
십자가는 성경의 심장이며, 복음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그 사랑, 그 고난, 그 자발적인 자기포기,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프로그램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우리를 통제하지 않고, 대신 우리 앞에 피 흘리며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초청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십자가 위에서 속삭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해 죽었다.
이제 너희도,
너희의 확신을 죽이고,
너희의 자만을 내려놓고,
너희의 해석과 이념과 체면을 벗어버리고,
나를 통해 다시 살아나라.”
이 초청에 응답하는 이들은,
성경을 다시 읽게 됩니다.
죽임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살림을 위한 복음으로.
억압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해방을 위한 십자가로.
지배의 논리가 아니라, 자기비움의 사랑으로.
그리고 그때,
우리는 드디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활자 속에만 있지 않고,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 흘린 사랑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