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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왜 세상에는 이렇게 끝없는 고통이 계속되는 걸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막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어떤 고통은 그냥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실까?

내가 기도해도 아무 일도 변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정말 듣고 계신 걸까?
아니면… 그분은 아예 침묵하시는 걸까?


신앙 안에 있어도,
이 질문은 언제나 다시 찾아옵니다.

병실에서,
장례식장에서,
무너진 자리에서—
그 질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정말 아시는가?”
“그분은 지금도 함께 계신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고통에도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면요—
그 말이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진짜 위로가 될까요?


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절망 속에서 하루를 버티는 이에게,
그 말이 정말 복음으로 들릴 수 있을까요?


그분이 진짜 인간의 몸으로,
피 흘리고 울고 절규하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지금 이 현실의 고통에서
어떤 실질적인 위로가 될 수 있죠?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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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부활의 복음



1.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고백이 왜 절실한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초대교회가 단호히 거부했던 고대의 이단 ―
예수께서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허상 ― 에 마음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셨다는 고백은 익숙한 반면,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고백은 쉽게 소홀히 여겨집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은 현실의 고통과 단절된 추상에 머물며,
삶의 비극 앞에서 아무런 실제적 위로도 건네지 못하는 공허한 종교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복음은 신의 높아짐이 아니라, 신의 낮아지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 미친 듯한 선언은,
우주의 창조자가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다는 뜻이며,
이는 단순한 신학적 사실이 아니라 고통을 변혁시키는 우주적 계시입니다.

그분은 기침하셨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상실 앞에 절규하셨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고통을 면제하는 통제자가 아니라,
고통을 감당하는 연대자로 세상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명령만 내리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피와 눈물 속으로 직접 걸어오신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그 어떤 고통도 구원될 수 없다.”
― 고대의 지혜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단지 윤리적 교사나 초월적 구원자가 아닌,
실제로 고통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완전한 인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분의 인성은 우리의 인성을 정화시키며,
그분의 눈물은 우리의 눈물을 거룩하게 하고,
그분의 절규는 우리의 절규를 하나님의 언어로 번역해줍니다.

이 복음은 단지 위로가 아니라,
현실을 뚫고 들어오는 생명의 선언입니다.


2.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 지성으로 충분하지 않은 답

이제 우리는 그 다음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 고통 앞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신학은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고통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이다.”

이 해석은 이론적으로는 설득력을 갖지만,
현실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 전쟁터에서 가족을 잃은 자, 절망 끝에 선 이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규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가능성을 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더 깊은 절망 속에서 묻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정말 이해하시는가?”


복음은 이 질문에 이론이 아니라 인격으로 응답합니다.

“나는 너처럼 피를 흘렸고, 너처럼 버림받았고, 너처럼 죽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감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노출, 자발적 패배, 무력함을 통한 승리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계획하지 않으시지만,
그 고난을 결코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폐허를 새 창조의 재료로 삼아,
부활을 조각하십니다.


3. 열린 미래, 닫히지 않은 소망 ― 하나님은 무능한가, 아니면 사랑이신가?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오해가 등장합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미래를 정확히 모르신다면, 그분은 전능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되묻습니다.
“진정한 전능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건을 미리 통제하는 능력인가?
아니면 모든 자유와 가능성을 사랑으로 포용하며,
그 안에서 선을 창조해 내는 능력인가?


진정한 능력은 통제가 아니라 인내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모든 가능성 속에 사전적 구속 계획을 세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수조 개의 가능한 시나리오 속에서,
당신의 고통까지도 예상하며, 그 안에서 선으로 전환할 준비를 이미 마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는 기술자가 아니라,
모든 슬픔을 안고 부활로 이끄는 아버지이십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예정된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고통조차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때,
하나님의 이야기로 다시 쓰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낭비되지 않는다.
이 고통조차도, 언젠가 부활의 언어로 해석될 것이다.”


4.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다”는 자리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이제 그 사랑이 실제 현실의 가장 끔찍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한 부모가 13살의 아들을 자살로 잃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교리도, 설명도, 이론도 이 상황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더 이상 질문이 아니라 비명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함께 우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예수께서도 절규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상실, 절망, 배신을 몸소 경험하셨고,
죽음의 심연 속으로 스스로 내려가셨습니다.

지금 자녀를 잃은 부모의 심장을 찢는 그 절망 속에,
하나님도 함께 무너져 내리십니다.

그분은 멀리 떨어진 무심한 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도 잃으신 아버지,
피 흘리며 함께 절규하시는 창조자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고,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을 내던집니다.


5. 절망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은 가능한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섭니다.

“이 절망 속에서도 정말 선이 가능합니까?”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그러나 이 문장은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는 너무 값싸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십자가의 깊이와 부활의 실재에서 우러나온 신앙의 용기여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절망도 끝이 아니다.”
― 이 믿음은 부활로 증명된 고난의 변증입니다.


십자가에서 철저히 무너졌던 그분조차도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면,
우리가 지금 당하는 이 실패와 상실도 다시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리사이클링하시는 분이십니다.
폐허의 돌들을 모아 영광의 성전을 세우시는 분,
불타버린 것들 위에 새 창조를 선언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작업에,
하나님은 당신을 동역자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인생의 벽돌을 한 장씩 다시 쌓아가는 일,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선을 창조해 가시는지를 믿고 동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한 플랜B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도 사랑의 계획을 준비해 두신 분입니다.


6. 짧은 이야기에서 긴 이야기로 ― 고통의 무게보다 더 큰 사랑의 이야기

우리의 고통은 대개 짧은 이야기 안에 갇혀 있습니다.
오늘의 실패, 오늘의 상실, 오늘의 절망.

그러나 하나님의 이야기는 훨씬 더 깁니다.

죽음조차 끝이 아니며,
모든 눈물이 닦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사가 지금도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짧은 고통을 긴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엮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종국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날로 향합니다.
(에베소서 1:10)

“무엇이든 사랑으로 쓰인 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상처를 새 창조의 문장으로 바꾸실 수 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던 고통의 순간들조차도
부활의 시점에서 다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은 속삭이실 것입니다.

“네 고통은 헛되지 않았다.
너의 눈물은 내 병에 담겨 있었단다.”
(시편 56:8)


이것이 바로 복음이 주는 종말론적 위로입니다.
죽음으로도 끝낼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
절망을 뚫고 피어나는 생명의 꽃.

그 이야기는 지금도 당신을 향해 쓰이고 있습니다.


7. 결론 ― 복음은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고통을 통과한 사랑을 완성한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원하시는가?”
“복음은 고통을 제거하는가?”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복음은 고통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고통을 통과하여, 그 안에서 사랑을 완성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생명의 출구가 되었습니다.

무덤은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부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뒤에 따라오는 부활의 약속을 믿고,
지금 이 고통의 순간 앞에서 무릎 꿇습니다.

“예, 하나님은 고통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음의 진실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 실제로 체험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깊은 신음 속에서 함께 탄식하시는 분이시며 (로마서 8:26),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작동시키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절망의 메아리를 희망으로 바꾸시는 분,
고통의 깊이에서 사랑의 깊이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지금도 부활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당신 곁에서 함께 울고 계신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향해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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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16 시간 전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슬픔을 당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으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다 길 잃은 양처럼 제각기 잘못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사람들 중에 그가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는 범죄하거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나 악인들처럼 죽음을 당하여 부자의 묘실에 묻혔다.
    (이사야 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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