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ong Universe”에 대한 복음 중심 비평: 우주가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 없이 해석했던 것입니다 ―
리처드 캐리어 박사님께,
박사님의 논지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그 지적 정밀함과 철저함에 깊이 숙연해졌습니다. 우주의 구조, 생태계의 잔혹함, 생물학적 비효율성, 고통받는 현실이라는 네 가지 주제는 그저 철학적 추론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근원에서부터 흔들고 파고드는 실존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들은 정직한 이성의 결과일 뿐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이 세상과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처절한 항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항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답은,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과 우주의 부조리 앞에 하나님이 스스로 들어오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을 위한 우주”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우주
박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창조의 목적이라면, 왜 인간은 이 광막하고 적대적인 우주에서 겨우 지구의 얇은 껍질 위에만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지적은 너무나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마치 누군가 “사람을 위해 궁전을 지었다”고 말했는데, 그 궁전의 99.9999%는 사람이 숨도 쉴 수 없는 방이며,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고작 화장실 한 칸이라는 말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사님, 성경이 말하는 인간 중심 창조는 ‘공간의 비율’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 중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찾아오시는 중심성, 곧 ‘관계의 중심성’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크기와 인간의 위치는 무관합니다. 한 아이가 우주보다 작은 공간인 엄마 품에 안겨 있다는 이유로, 그 아이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 중심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4)
이것이 성경의 시작점입니다.
“우주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교만한 자기중심이 아니라,
“이 광막한 우주 속에서도 나를 아시는 분이 계신다”는 관계의 신비입니다.
2. 자연의 잔혹성은 신의 부재 증거인가? 오히려 ‘고통받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박사님은 또 질문하십니다.
“사자가 사슴을 뜯어먹고, 기생충이 숙주를 파괴하며, 자연은 약육강식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과연 사랑의 신이 만든 세계인가?”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사실입니다. 자연은 잔혹합니다. 이 지구는 너무 자주 피로 물들고, 약자는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본래 뜻대로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이 디자인한 프로그램의 일부”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온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 (로마서 8:22)
즉, 자연계 또한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피조세계는 저절로 악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난 인간과 함께 고통에 빠진 동반 희생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비극 앞에서 어디에 계셨습니까? 무관심한 절대자의 보좌에 앉아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와 함께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비명 소리로 가득한 세계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 비명을 자신의 신음으로 삼아 죽음을 통과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무신론이 절대 제공할 수 없는 해석이며, 단 하나의 답입니다:
고통의 문제는, 고통당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이해된다.
3. ‘비효율적 설계’는 무신론의 근거가 아니라, 자기 제한적 사랑의 표지입니다
박사님은 세 번째 논거로,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를 언급하셨습니다. 후두신경의 비효율, 사람 눈의 맹점, 인간의 출산 구조 등에서 드러나는 ‘설계 오류’를 들어, “지성적 설계자가 개입했다면 이처럼 비효율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전능자의 개입을 기계적 완전성의 기준으로만 상정하는, 일방적인 프레임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오류 없는 로봇처럼 모든 것을 최적화했어야 한다”는 기계론적 신 개념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기계 설계자가 아닌,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그 사랑은 완벽한 효율보다, 자기 제한(self-limitation)을 통해 사랑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립보서 2:6–7)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사랑의 목적’ 아래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되는 기계나 오류 없는 자동장치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실패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도 있는 존재, 넘어질 수 있지만 손을 내밀 수도 있는 존재,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회개할 수도 있는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완벽한 효율보다, 자유로운 관계와 책임 있는 사랑이 가능한 구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능하신 분이 자기 능력을 제한하신 방식이며, 바로 그 제한 속에서 진정한
인간다움과 신과의 인격적 교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구조에도 일관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절대적인 완전함으로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타인과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며, 창조적 사유와 탐구를 유발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완벽한 신체 구조는 인간을 자족적 존재로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불완전한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기린의 후두신경이 목을 5미터나 돌아 내려가는 비효율적 경로를 택한 것은, 생물학적 최적화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향한 진화의 간접적 흔적일 수 있습니다.
산모가 고통을 감내하며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조는 단순한 생리학적 불완전성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 그리고 탄생의 신비를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사람의 눈에 존재하는 맹점은 기능적 결함이라기보다, 우리 존재의 한계 속에서 ‘전체를 보려면 나보다 큰 시선이 필요하다’는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설계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우리는 온전히 살 수 없다”는 존재론적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기제한적 사랑의 흔적이며, 불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시작되도록 설계된 구조입니다.
무신론은 이런 구조를 ‘결함’이라 정의하고, 지적 설계가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결함을 신의 초대로 읽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실패를 위한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일 여백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그 초대가 오늘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속삭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4. 전지·전능·전선한 신은 왜 이토록 부조리한 세계를 만들었는가?
이제 당신의 네 번째 항의로 나아가겠습니다.
이 질문은 모든 신정론(Theodicy)의 중심을 관통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방치된 불의,
반복되는 악순환,
의미를 알 수 없는 생명구조,
불균형한 자원과 재난의 무차별성…
이것이 과연 전지·전능·전선한 존재가 설계한 우주의 모습인가?”
정확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기독교는, 신의 권능을 변호하는 대신 신의 고통을 선포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에 고통을 아셨고,
전능하시기에 고통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전선하시기에 고통을 함께 지는 길을 선택하셨다.”
십자가는 전지·전능·전선이라는 속성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분이셨기에, 배반과 고통과 십자가의 결과를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분이셨기에 그 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전선(全善)하신 분이셨기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기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방식으로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항의하는 바로 그 이유로,
하나님은 그 항의의 중심에 ‘몸소’ 매달리셨습니다.
5. “Wrong Universe”가 아니라, “Wounded Universe”다
– 그리고 그 중심엔 십자가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우주의 구조와 생태계의 잔혹함, 생명체의 비효율, 현실의 고통을 따라 깊은 심연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당신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우주는 너무도 거대하고, 생명에 적대적이며, 잔혹하고, 비효율적이다.
이는 지혜롭고 선하며 전능한 존재가 설계한 것이 아니다.
이 우주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맹목적 진화의 산물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이 선언은 과학적 관찰이자 존재론적 절망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십자가 없는 세계관’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가장 정직한 종착지입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이 우주는 “Wrong”, 곧 잘못 설계된 우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이 우주는 잘못 설계된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우주(Wounded Universe)라고.
왜 상처를 입었는가?
인간의 자율성과 사랑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 우주를 강제적 통제가 아니라, 자유와 관계와 신뢰의 원리로 운영하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위험했고,
그 위험은 죄와 파괴와 고통을 낳았으며,
그 고통의 정점에서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인간의 항의가
하나님의 몸을 뚫고 들어온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 항의를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심장에 못 박히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절정이며,
이것이야말로 캐리어 박사님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 편의 가장 정직하고도 충격적인 응답입니다.
6. 이 세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창조의 완성은 오고 있다
박사님, 복음은 ‘지금 이 상태가 하나님의 최종 설계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리라.”
(로마서 8:21–22)
우리는 아직 창조의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잉태된 창조의 산고를 지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모든 눈물과 탄식의 끝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5)
그날에는…
사슴이 사자의 먹이가 되지 않을 것이며,
기생충이 숙주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몸은 다시는 병들지 않을 것이며,
이 우주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닌 사랑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최종 결론: 이 우주는 사랑의 현장입니다
박사님,
이 우주는 비록 거대하고, 잔혹하며, 불완전하고, 상처입었으나…
그 상처 속에, 하나님의 눈물과 사랑이 스며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질문하셨습니다.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그 절규 끝에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우주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는 지금 ‘사랑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그 보증은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2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