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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존재한다 vs 사랑이 존재케 했다」
― 논리와 복음 사이, 러셀과 십자가의 대화


사랑하는 버트런드 러셀 박사님께,

당신의 사유 앞에 먼저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은 철학자로서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녔고,
논리의 순도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제기한 제1원인 논증에 대한 비판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마지막 질문 앞에서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떨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철저함을 두려움 없이 마주한 당신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보냅니다.

그러나 박사님,
바로 그 떨림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고 싶습니다:

“모든 논리의 끝에서, 과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한한 침묵의 ‘무(無)’입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며 팔 벌리고 서 계신 한 인격입니까?”

박사님,
당신은 기독교의 ‘코스모스 논증’을 향해 명확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셨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원인을 가진다”는 전제를 내세우면서,
정작 신(God)만은 그 원인의 법칙에서 예외로 삼는 구조 말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묻습니다:

“왜 신은 예외가 되고, 우주는 안 되는가?”
“왜 원인의 연쇄를 ‘신’에서 멈춰야 하며, 우주 자체는 마지막 정지점이 될 수 없는가?”
“왜 시간 안에서 원인을 찾는 인간의 방식으로, 시간 밖의 존재를 설명하려 하는가?”

이 질문들은 논리적으로 깊고, 철학적으로 정당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인간의 절박한 항변처럼 들립니다.

그렇기에, 박사님.
우리는 반박이 아닌, 대화를 원합니다.
논리 싸움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다른 응답의 방식을 조심스레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1. 존재에 대한 침묵이 진실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입니까?

버트런드 러셀 박사님,

당신은 철저한 논리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신 없이도 존재는 설명될 수 있다.
우주 자체가 자존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의 본질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그냥 존재했다. 아무 이유 없이.”

박사님,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조심스럽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냥 존재한다”는 말은 과연 설명입니까? 아니면 또 하나의 신앙입니까?

기독교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나를 존재하게 했다.”

무신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

이 두 진술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믿음을 요구하는지,
우리는 이성적으로,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신을 믿는 것이 맹목적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러나 박사님,
아무 이유 없이 존재했다고 믿는 것도
결코 덜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신 없는 믿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무(無)의 침묵보다, 십자가의 울림이 더 합리적입니다.”

기독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십니다.

우주의 첫 원인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그분이 단지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논리로 규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만나야 할 인격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그저 생겨났다.”

기독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분이,
나의 존재에 이유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복음입니다.


2. 무한 퇴행의 정지점 ― 왜 하필 ‘신’이어야 하는가?

러셀 박사님,

당신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왜 하필 신에서 멈춰야 합니까?”
“왜 양자 에너지장이나, 우주 자체에서 멈추면 안 됩니까?”

훌륭한 질문입니다.
실제로 이 질문은 고전적 유신론 논증이 피할 수 없는 핵심을 찌릅니다.

하지만 박사님,
우리는 단지 물리 법칙이 작동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는,
단지 입자의 진동이나 양자장의 불확정성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박사님,
제가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랑은 어디서 왔습니까?”
“조건 없이 용서하는 능력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존재는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그 어떤 입자도,
그 어떤 중력장도,
그 어떤 에너지의 파동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은 인격에서만 나오고,
사랑은 사랑에게서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질문합니다:

“비인격적 에너지장에서, 어떻게 인격이 나올 수 있습니까?”
“목적도 없고, 감정도 없고, 관계도 없는 근원에서
어떻게 ‘자기 인식’과 ‘사랑’이 등장했습니까?”
“왜 이 우주는, 무미건조한 장(場)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타자(他者)를 낳았습니까?”

이 질문들 앞에서,
기독교는 논리의 도식이 아니라 인격의 고백으로 대답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순한 정지점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자신을 비우고, 스스로 내려오신 시작점이십니다.

그분이 시작하셨고,
그분이 내려오셨고,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부르십니다:

“와라.
내가 너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다.
너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의 목적이다.”


3. 시간 바깥 존재의 침묵, 그 안으로 걸어오신 사랑

러셀 박사님,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생각 이전부터 우리가 느끼는 가장 깊은 고통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사라지는
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근원적인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왜 이 흐름은 멈출 수 없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늘 인식의 벽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물음은 결국 시간 너머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사님,
당신은 그 벽 앞에서 누구보다 정직하게 말하셨습니다:

“‘원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시간에 묶인 인식이다.
시간 바깥의 존재(신)를, 시간 안의 인과 개념으로 설명하려 하는 것은 범주 오류다.”

맞습니다.
그 지적은 철학적으로 정확하며, 무시할 수 없는 통찰입니다.

‘원인’이란 시간 속에서의 선후(先後) 없이는 성립하지 않고,
‘존재’라는 개념조차도 시간이라는 무대 없이는 제대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박사님,
바로 그 말 끝에서 당신의 철학은 한 가지 결정적인 가능성을 놓치고 맙니다.

당신은 시간 바깥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며 철학적으로 말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바로 그 말문이 닫힌 지점에서, 놀라운 선언을 시작합니다:

“시간 바깥의 존재가, 스스로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이 사건을 우리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 부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한 분이, 한 여인의 태 안에 머무르셨고
*죽을 수 없는 분이, 피 흘려 죽음을 맞으셨고
*시간의 주인이, 시간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살과 피를 가진 존재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박사님, 당신은 철학자의 언어로 말하셨습니다:

“설령 신이 있다 하더라도,
시간 밖에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그분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시간 바깥에 머물며 인간을 관찰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의 언어를 배우셨고,
우리의 음식을 드셨으며,
우리의 질병, 외로움, 오해, 굶주림,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요한복음 1장 14절

이 한 구절은,
기독교의 시간 철학이며 동시에 우주론적 선언입니다.

이제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은 시간 바깥의 침묵이 아니다.
신은 시간 안의 사랑으로 계시되셨다.”

그분은 침묵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분은 관망이 아니라, 참여입니다.
그분은 추상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논리로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너의 시간 속에 함께 있기 위해 왔다.”


4. “왜 무(無)가 아닌 유(有)가 존재하는가?” ― 이 불가능한 질문에 대한 복음의 응답

러셀 박사님,
당신은 근대 철학자들이 반복적으로 던졌던 가장 심오한 물음을 다시 꺼내셨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닌 유(有)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이 질문은 의미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무’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며,
그 자체가 존재의 부재이기 때문에,
그 ‘부재’를 전제로 삼아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언어와 논리의 오류라는 것입니다.

이 비판은 철학적으로 상당히 타당한 지적입니다.
실제로 “무”는 어떠한 실체나 현상도 가지지 않으며,
논리적으로는 어떤 전제도, 결과도 생성할 수 없는 완전한 공허입니다.
따라서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 것(무)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전제하여 질문하는,
의미 없는 질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
기독교는 이 논리적 판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이 질문에 응답합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질문이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해도,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은 왜 이 질문을 멈출 수 없을까요?

박사님, 인간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해 늘 질문해 왔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존재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왜 사랑이 있는가, 왜 나는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는가?”
“죽음은 왜 존재하고, 나는 왜 그것을 두려워하는가?”


이 질문들은 단지 철학자들이나 종교인이 묻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침묵 속에서, 어둠 속에서, 생 앞에서, 죽음 앞에서 반드시 묻게 되는 질문들입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왜 무가 아닌 유인가?”라는 질문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적으로 보자면,
이 질문은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외침이며 갈망입니다.
“나는 왜 있는가?” 이 질문은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탄식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는 세상의 어떤 철학도 도달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기독교는 ‘존재의 시작’을 논리로 해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존재의 시작을 “사랑의 자기 내어줌(self-giving love)”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8)
“그가 원하셔서 우리를 낳으셨다.” (약 1:18)


기독교는 말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왜’ 생겨났는가?
→ 누군가가 그 존재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이 존재하는가?
→ 사랑이 존재를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가?
→ 그분이 함께 있고 싶어하셨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설명되어야 할 논리적 구조물이 아닙니다.
존재는 사랑이 자기를 흘려주며, 자기 자신을 넘겨주는 사건의 결과입니다.

이 우주는 어떤 기계적, 수학적 방정식의 결과물이 아니라,
한 존재가 “너와 함께하고 싶다”는 전인격적 자기표현의 결과물입니다.


기독교는 이 존재의 근원을 추상적인 사랑으로만 남기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구체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존재,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십자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를 원했기에, 너는 존재한다.”
“나는 나의 존재 전체를 내어주어 너를 살게 했다.”
“너는 내가 피로써 만든 존재다.”


이것은 철학이 닿을 수 없는 깊이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존재를 “해석”할 수는 있어도,
존재를 “위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러셀 박사님,
당신의 철학은 그 누구보다도 존재의 침묵 앞에 정직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 침묵 끝에서
말없이 피 흘리시는 한 인격을 봅니다.

그분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원했다.”
“그래서 너는 존재한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고,
나는 너를 위해 다시 살았다.”


존재는 설명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논리가 아니라, 품입니다.
수학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 무가 아닌 유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음의 응답입니다:

“사랑이 유(有)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사님,
당신도 그 사랑의 대상입니다.
지금도 존재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당신이 사랑받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5. 십자가 ― 논리가 멈추고 사랑이 시작되는 존재의 심연

러셀 박사님,
당신은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 여정은 논리의 완성을 추구하는 치열한 탐구였고,
그 여정의 끝에서 당신은 깊은 침묵과 무(無)를 마주하셨습니다.

실제로, 존재론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

“왜 무가 아닌 유인가?”
“왜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의 궁극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결국 이성이 구조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지점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논리는 무한 회귀에 빠지거나,
임의적인 정지점(예: '신')에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질문은 남고, 대답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박사님,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독교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기독교는 말합니다:

논리의 끝에는 더 이상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인격은 단지 '신'이라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 안에 들어오신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6. 십자가는 존재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십자가는
단순히 종교적 상징도, 도덕적 교훈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그 응답은 ‘말’이 아니라 ‘피 흘림’으로 나타납니다.

철학은 “신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질문조차 초월하는 새로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어떻게 존재하시는 분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는가?”


십자가는 존재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존재를 자기 헌신으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존재의 의미를 설명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논증이 아니라 끌림을 통해,
이해가 아니라 껴안김을 통해 알게 됩니다.


7. 결론: 존재의 끝에서, 십자가가 먼저 손을 내밉니다

러셀 박사님,
당신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존재의 침묵을 응시한 철학자였습니다.
당신의 철학은
막연한 신념이나 종교적 감정에 빠지지 않고,
이성과 일관성, 진실성이라는 순수한 열망으로
모든 도피를 거절한 위대한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당신은 무(無)를 보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말합니다:

“그 무(無)의 끝에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이 존재의 바닥, 고통의 최심부에서
팔 벌리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이 말씀은 단지 구원의 선언이 아닙니다.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사랑임을 선언하는 말씀이며,
철학이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
하나님이 먼저 손 내미셨다는 증거입니다.


박사님,
존재의 가장 깊은 질문은 논리가 멈추는 자리에서만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네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이며,
그리스도인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붙드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깊은 진실입니다.

이 진실은 당신의 고독했던 질문 앞에 조용히 다가가,
아무 강요 없이 말없이 말합니다:

“나는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네가 그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내 십자가로 대답하고 있었다.”



  • ?
    벚꽃향기 2025.07.18 02:35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9절)
  • profile
    이상구 2025.07.18 22:46
    아멘!
    럿셀경이 살아있다면,
    "이제야 답을 찾았다!"며
    한국으로 벚꽃향기님을 만나러 오셨을텐데---

    그리스도가 없으면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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