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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심장으로 다시 묻다:
「적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강의에 대한 신학적·성경적 비평 



1. 들어가며: 적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적 시선은 존재하는가?

존경하는 김 선생님,
강의에서 전해주신 예언의 통찰과 역사적 해석의 정열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적그리스도를 주제로 삼아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하신 그 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자 하는 순전한 열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강의에서 전개된 ‘적그리스도 해석’은,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복음의 중심성과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십자가를 가리는 방향으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적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조차 사랑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그 점에서 적그리스도 담론을 복음 중심으로 다시 해석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선생님의 강의에 대한 경청과 함께 조심스러운 비판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2. 비판 1: “적그리스도=로마 교황권”이라는 단선적 해석의 위험성

강의의 핵심 주장은 분명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로마 가톨릭 교황권이다.”
이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의 역사적 전통을 따르는 것이며,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의 ‘작은 뿔’ 및 ‘짐승’을 로마 가톨릭과 연결 짓는 역사주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1) 구약의 상징과 신약의 십자가 계시를 분리해버린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강의는 상징을 복음과 무관한 정치적 실체로 고정시키며, 십자가의 중심성과 계시의 완결성을 소외시킵니다.

"짐승이 누구인가?"보다 먼저 묻고 들려야 할 질문은:
“그 짐승과 맞서신 어린양은 누구이신가?”입니다.
복음은 짐승을 분석하기보다, 어린양을 선포합니다.

(2) ‘적그리스도’를 ‘인간 세력’에 고정시켜 사랑을 막는다

가톨릭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적의 진영에 묶어버리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정죄하시면서도 니고데모를 품으셨고, 로마제국 하에서도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복음은 구조를 비판하되,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체제 비판보다 더 크며, 그 안에 있는 영혼들을 구하려는 사랑으로 작동합니다.



3. 비판 2: 복음은 정죄의 날이 아니라, 끌어안는 날이다

선생님의 강의는 종말의 적그리스도를 경고하면서, 매우 명확한 대상을 지목합니다. 로마 교황권, 종교개혁 후 퇴락한 교회, 중세 암흑기의 신앙 타락 등.
그러나 복음은 "이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고 증언합니다.

신약에서 ‘적그리스도’는 사도 요한에 의해 언급되며, 그 정의는 단순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지 않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니라.” (요한일서 2:22)


즉, 적그리스도는 단일 정치세력이나 종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인격으로 부정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는 모든 영적 구조를 뜻합니다.
그것은 로마만이 아니라, 개신교 안에도 있으며, 정통 교리 안에도, 때로는 열심 있는 설교자 안에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죄나 예언 해석의 정확함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신지를 삶으로 시인하는 복음적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정확한 판단’이 아니라 ‘자기부인의 사랑’으로 어둠을 이기셨습니다.


4.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외부의 적이 아닌, 복음의 그림자

선생님은 강의 내내 “적그리스도”를 바티칸의 교황권으로 특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는 ‘복음을 대적하는 존재’이지, 반드시 가시적인 제도나 조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나니”(요일 2:18)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특정 역사적 체제 하나로 귀결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적그리스도”는 단순한 ‘교리 왜곡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심각한 왜곡은 십자가의 복음을 제도와 교리, 조건과 공포로 대체하는 모든 종교적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적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은혜 대신 율법을 강조하고, 십자가 대신 성과를 요구하며, 사랑 대신 정죄를 내리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이는 바티칸만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오늘날 복음을 잊은 교회 모두에게 향한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4)을 전하는 자들을 경고하며, 그 배후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이라고 했습니다(고후 11:14). 바로 이 ‘내면의 적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특정 세력이 아니라, 복음을 조건으로 바꾸고 사랑을 율법으로 대체하는 모든 복음의 왜곡자들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진리를 수호하려는 열심의 이름으로 행해질지라도 말입니다.


5. 짐승의 수와 복음 – 공포의 암호가 아닌, 예수의 대조적 계시

선생님은 짐승의 수 666을 교황의 라틴어 칭호 “Vicarius Filii Dei”의 로마 숫자 환산을 통해 해석하십니다. 이 해석은 오랜 세월 교회 안에서 반복되어 온 역사주의적 해석의 전통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복음 중심의 계시 해석이라는 근본 질문 앞에서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 중의 교회를 향한 위로의 서신이며, “죽임당한 어린양”의 승리를 선포하는 복음적 계시입니다(계 5:6, 7:14). 따라서 666은 단순히 ‘나쁜 세력의 암호’가 아니라, 어린양의 숫자 777과 대조되는 불완전한 인간 권력의 상징입니다.

6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이며(창 1:26–31), 7은 안식과 완성의 상징입니다(창 2:2–3).

따라서 666은 인간의 자율과 권력이 스스로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반복된 시도, 즉 완성을 흉내 내는 불완전한 모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짐승의 진짜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외적인 정치세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흉내 내며 자기 자리를 주장하는 종교적 시스템, 더 나아가 복음을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바꾸는 모든 인간 중심의 구원 시스템입니다.

그 짐승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그 모습은 사랑이 없고, 희생이 없으며, 자기 영광을 위해 움직입니다(살후 2:4). 그러므로 짐승은 우리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 안의 영적 권력 욕망, 복음이 아닌 교리적 우월감, 사랑 없는 열심 속에 존재합니다.


6. 복음은 대립이 아니라 십자가의 승리로 드러난다

선생님의 강의는 일관되게 ‘적그리스도 세력’과의 대결 구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본질은 대결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주인공은 적그리스도도 아니요, 바벨론도 아니요, 짐승도 아닙니다. 오직 어린양입니다.

그 어린양은 칼을 들지 않았고,

군대를 이끌지 않았고,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죽임당한 채로 보좌에 계셨습니다(계 5:6).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이긴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승리는 십자가에서 ‘지심으로’ 이루어진 승리입니다. 복음의 전쟁은 무력과 정보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희생이 폭력을 이기며, 용서가 정죄를 이기는 전쟁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누가 적그리스도인지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십자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 “적그리스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복음의 대답

선생님은 “적그리스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네가 적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복음은 적을 폭로하지 않고, 십자가를 선포합니다. 복음은 세력을 규탄하지 않고,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복음은 숫자를 해석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복음의 길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분의 빛이 모든 어둠을 밝히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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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2025.06.09 01:40
    666을 해석하느라, 777을 잊지 맙시다 – 어린양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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