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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재림교회 공식입장: 재림교회와 엘렌 G. 화잇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가? 재림교회는 바울이 권면한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롬 8:1-2)을 굳게 믿는다. 또한 그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했을 때 그가 가졌던 확신을 우리 재림교인들은 함께 공유하고 있다. 사도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말했고,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셨다. 재림교인들은 이 말씀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다.이와 똑 같은 선상에서 엘렌 G. 화잇도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분명하게 할 때 우리는 유쾌하고 기뻐하는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복음전도, 630, 강조 첨가)라고 말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또한 당연히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임을 분명하게 밝혔다.한편, 이 “구원의 확신”은 믿는 자의 자의적인 감정이나 자기 신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봄”(히 12:2)으로 이르러 오는 것이다. 화잇 여사는 “멸망해 가는 죄인은 … 나는 죄인이지만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갈바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더 이상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분은 나의 칭의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나를 지금 구원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의 약속하신 용서를 지금 받아들인다”(가려 뽑은 기별, 3권, 356)고 말한다.하지만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혹시라도 신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믿음의 실천을 등한히 하고 영적인 성장을 포기한 채 자만과 독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권면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화잇 여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대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 실로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취하는 태도 가운데 따르는 위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대들은 선행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살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착한 행실을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믿으라. 믿기만 하면 살 수 있다.’라고 말한다. 믿음과 행함은 병행해야 하며 믿는 일과 행하는 일은 잘 혼합되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3).“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완전히 의존해야 함을 느끼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손을 거두며 ‘내게는 할 일이 없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예수께서 그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속성의 참여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 경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경성하며, 기다리며, 기도하며, 일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98).“누군가는 말한다. ‘그래, 우리는 아무런 행함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 사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충성하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은 사망의 길에 서는 일이며, 그대는 진실로 범죄자의 한 사람이 된다.”(믿음과 행함, 71).이 모든 말씀을 종합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신 구원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동시에, 그 구원이 일단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므로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넘어질까 조심하며”(고전 10:12),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버림이 될까 두려워”(고전 9:27)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라는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죄인인 인간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을 때 이미 구원을 얻었고(롬 8:24), 현재도 그리스도 안에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얻고 있으며(고전 15:2), 미래에도 인간이 죄악의 모든 권세와 영향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9). 과거에 받은 구원이 아무리 극적이었고 완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배반하거나 진리에서 떠나면 그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구원의 과정이 이렇게 분명하고도 확실한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에 기초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취하는 태도 가운데 따르는 위험이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3)라고 권면한 화잇 여사를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그분의 의도를 곡해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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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복음을 가두는 조건의 벽》
ㅡ한국 재림교회 ‘구원의 확신’ 공식 입장에 대한 복음 중심 3부작 비평 


1부:구원의 언어를 빌려, 율법의 구조를 세우다

1. 서론: 겉은 복음 같지만, 속은 조건으로 짜여 있다

한국 재림교회는 공식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재림교인들은 바울이 말한 구원의 확신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음을 믿는다.”
엘렌 화잇 또한 “구원의 확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라고 말했다고 인용합니다.

이 진술만 보면, 그들은 복음주의적 확신론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뒤따라 이어지는 구조를 보면, 이 언어는 복음을 인용하되, 실상은 조건과 경계, 경성과 자기검열로 뒤덮인 전혀 다른 체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입장문은 “구원의 확신은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 확신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에게만”, “넘어질까 조심하는 자에게만”,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자에게만” 허락된다고 합니다.
즉, 확신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유지되고 점검되어야 하는 상태로 정의됩니다.

복음의 언어를 빌려오되, 구조는 율법적 사고에 기반해 있는 것,
그것이 이 문서의 결정적인 이중성입니다.


2. 구원의 확신, 선포인가 자격인가?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너희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이 말씀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확신은 완료형이고, 선포적이며, 하나님 편에서 이미 이루어진 선언이라는 점입니다.
확신은 자격이 아니라 복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재림교 입장문은 이러한 선포적 확신을 ‘잠정적 가능성’으로 바꿉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예수를 바라볼 때 오는 것이다. 그러나 자칫 자만과 독선으로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집니다:

“믿음과 행함은 병행되어야 하며, 믿는 일과 행하는 일은 잘 혼합되어야 한다.”
“경성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며, 일해야 한다.”
“율법을 범하면 사망의 길이며, 범죄자가 된다.”


이 모든 진술은 구원의 확신을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 점검 가능한 신앙 상태로 환원시킵니다.
결국, 구원은 “받았느니라”가 아니라, “받고 있는 중이며, 끝까지 이루어야 할 과업”이 되어버립니다.


3. 엘렌 화잇 인용의 전략적 전환

입장문은 엘렌 화잇 여사가 구원의 확신을 긍정했다고 인용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분명하게 할 때 우리는 유쾌하고 기뻐하는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인데…”


그러나 바로 그다음 문장부터 분위기가 바뀝니다.
화잇 여사는 “나는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자칫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함께 가야 하며, 성화 없는 확신은 무책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은 “성화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구원의 조건인지, 결과인지,
구원을 위한 전제인지, 구원받은 자의 열매인지의 문제입니다.

입장문은 이를 분명히 하지 않고, 구원의 확신과 성화의 책임을 이중 엔진처럼 병렬구동 시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행위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하고,
확신은 매일의 자기 점검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잠정적 안정감’으로 격하됩니다.


4. 확신의 언어, 율법의 벽에 가로막히다

재림교회 입장문은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취하는 태도에 따르는 위험이 있다.”


이 문장은 구원의 확신을 교만의 위험성과 연동시켜 경고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복음의 확신은 자랑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시는 복음의 확신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만듭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누가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3)


확신을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스스로 감시하게 되고,
하나님의 선언보다 자신의 상태를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구조’이며,
‘십자가를 시작점으로 삼되, 완성은 내게 맡기겠다는 구조’입니다.



2부. 믿음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치겠느냐?


5. 구원의 삼시제 구조, 복음을 분절시키다

재림교회는 입장문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구원의 구조를 제시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을 때 이미 구원을 얻었고(롬 8:24), 현재도 그리스도 안에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얻고 있으며(고전 15:2), 미래에도 …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9).”


이 진술은 표면적으로 성경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치명적인 이분법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구원을 하나님이 이루신 확정된 은혜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 성취가 필요한 조건부 과정으로 만들어 버리는 구조입니다.

*과거의 구원은 “시작”일 뿐,

*현재의 구원은 “유지해야 할 신앙 상태”이며,

*미래의 구원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으로 전제됩니다.


이 구조는 결국 구원을 ‘받았으나, 완전히 받은 것은 아닌 것’처럼 만들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선포 대신, 인간의 경주와 자격 점검을 중심에 놓게 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복음 선포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3)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엡 2:8)


이 말씀들은 구원이 이미 주어진, 종결적 사건이며 현재적 현실이라는 복음의 본질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재림교회 입장문은 이 확정성을 미루고, 유보하며, 전제조건을 붙입니다.


6. ‘믿음+행함’이라는 혼합 구조: 열매와 뿌리의 전도(顚倒)

입장문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병행해야 하며, 믿는 일과 행하는 일은 잘 혼합되어야 한다.”


이 말은 외형상 맞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전제가 복음의 핵심 구조를 전도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행위는 구원의 결과이며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 (엡 2:10)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믿음은 뿌리이고, 행위는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기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지,
열매가 있어야 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문은 믿음과 행함을 병렬 구조로 두어, 행위가 없는 믿음은 허용되지 않으며,
행위가 있어야 구원의 확신도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 구조는 결국 확신조차 믿음의 결과가 아닌 행위의 자격증명으로 이해하는 구조가 됩니다.


7.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범죄자’라는 사망의 선언

공식 입장문 중, 가장 위험하고 폭력적인 선언이 이 문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은 사망의 길에 서는 일이며, 그대는 진실로 범죄자의 한 사람이 된다.” (믿음과 행함, 71)


이 말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예수님의 선포를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킵니다.
예수님이 이루셨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어기면 ‘범죄자’로 되돌아가며 사망의 길에 선다는 이 구조는,
복음을 교묘하게 가장한 율법 중심 구원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려 오셨다는 사실(마 5:17)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완성은 우리에게 다시 ‘율법 중심의 구원유지 과제’를 부과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한 목적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나니.” (롬 4:15)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롬 3:20)


복음은 인간을 율법 앞에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용납된 자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8. 복음은 방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안도 허락하지 않는다

재림교회는 구원의 확신이 자만과 방종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해 율법적 경고와 행위의 점검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자만하게 만드는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자가, 방종의 길로 달려가는가?

복음은 결코 사람을 자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감격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게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그 사랑에 미쳐 순종의 삶을 기꺼이 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화평을 누리자”고 말했을 때,
그는 동시에 이렇게도 외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 5:14)


복음은 방종이 아니라 내적 능력입니다.
율법은 외적 명령이지만, 복음은 내적 감동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진실로 전해질 때, 사람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3부. 다 이루었다 – 확신은 사랑의 선언이다


9. 복음은 확신을 금하지 않는다. 복음은 확신을 부른다

재림교회 입장문은 반복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언급하면서도,
그 확신이 언제든 잘못될 수 있는 위험한 심리 상태로 취급합니다.
확신이 자칫 교만, 방심, 율법 무시, 행위 경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는 점검과 경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즉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느니라.” (요 6:47)


이 두 구절은 하늘이 땅에 선포한 구원의 객관 선언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십자가 사건에 대한 신뢰의 응답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복음은 확신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확신으로 자유케 하고, 그 자유로 사랑하게 만듭니다.


10. 율법은 조건이 아니라 열매다

재림교회는 구원의 확신이 “율법을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하며,
확신을 갖는 자는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율법을 범하는 자는 “사망의 길에 선 범죄자”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율법을 조건으로 두지 않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전제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새롭게 하고, 그 새로움은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낳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주의 계명들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시 119:127)


율법 준수는 억지와 공포 속에서 유지되는 ‘의무’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사랑에 감격한 자가 자발적으로 살아내는 ‘기쁨’입니다.

재림교회가 우려하는 ‘방종’은 참된 복음을 모를 때 발생하지,
참된 복음을 깊이 알 때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되, 그 자유를 다시 사랑으로 메이게 하는 능력입니다.


11. 확신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을 낳는다

입장문은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교만할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복음 안에서의 확신은 자기 의에서 나오는 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의 가장 깊은 고백이며,
자신의 무가치함을 십자가 앞에서 정직히 고백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겸손한 특권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사도 바울은 가장 강력하게 확신을 말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외칠수록 더 낮아졌고,
더 은혜를 말할수록 자신을 무로 여겼습니다.

복음이 주는 확신은 결코 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찬양이고, 감격이고,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감격은, 사람을 사랑으로 다시 묶고,
십자가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12. 다 이루었다 – 그것이 확신의 근거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이 말씀은 구원의 종결적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길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계단을 만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친히 이루시고 완성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쉬고, 신뢰하고, 기뻐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안전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전쟁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는 존재들입니다.


복음은 “자격이 있는 자만 확신하라”가 아니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확신하라”고 외칩니다.


13. 결론: 이제 복음으로 말하십시오

이제는 복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너는 구원을 받았다”고.

“너는 더 이상 정죄받지 않는다”고.

“너는 영원한 사랑으로 붙들려 있다”고.

“너의 확신은 너의 자격이 아니라, 그의 피에 근거한 것”이라고.

“율법은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가 되었다”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를 심판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부르며, 자유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경외하게 합니다.


맺으며

재림교회의 구원 확신에 대한 공식 입장은, 외형상 복음을 말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여전히 율법의 그림자 아래 있습니다.
이제는 복음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완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더 이상 흔들릴 필요 없는 확신의 자유와 평안을 누리십시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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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10 시간 전
    구원의 확신은 내 감정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증언이 주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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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10 시간 전
    왜 나는 재림교회의 교리를 반복적으로 비평하는가

    ― 논박이 아니라 사랑, 비판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


    1. 단지 논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의 책임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자주 재림교회의 교리를 비판하는 글을 쓰십니까?”
    “이미 충분히 말하신 거 아닌가요?”

    그럴 때마다 제 안에서는 짧고 단호한 대답이 하나 떠오릅니다.

    “그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순히 재림교회의 교리를 반박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그 체계 속에 깊이 들어가 있는 분들,
    진심으로 성경을 연구하며,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려는 재림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분들을 향한 이 글들은, 논박이 아니라 대화, 공격이 아니라 호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을 더 깊이 함께 보자는 간절한 초청입니다.


    2. 재림교회 교리는 매우 정교하고, 매우 매혹적입니다.

    제가 재림교회 교리를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교리가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중심의 윤리 체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엮은 일관된 예언 해석,
    세상과 구별된 정체성,
    그리고 "이 교회만이 참된 남은 무리"라는 자기확신의 구조까지…

    재림교회의 교리는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매우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이들이 이 교리를 접하면,
    “와… 이 교회가 진짜 진리구나” 하고 깊이 매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구조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힘을 누구보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힘이, 때로는 복음을 가리는 커튼이 됩니다.


    3. 바로 그 정교함 속에, 복음의 본질이 왜곡됩니다.

    재림교회 교리는 놀라울 정도로 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율법과 예언을 진지하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전체 구조 속에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확신”,
    “율법이 아닌 은혜에 근거한 자유”가 자리 잡을 공간은 매우 좁습니다.

    사랑이 ‘조건’으로 바뀝니다.
    순종이 ‘자격 시험’이 됩니다.
    확신은 ‘경계 대상’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조건을 따지는 심판관처럼 보이게 되고,
    성도는 늘 자기 상태를 점검하며 두려움 속에서 경주하는 구도자가 됩니다.

    그 구조에 오래 머무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보다는,
    나의 경건함을 믿게 되는 방향으로 영혼이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구조는 복음이 아닙니다.”
    “이 정교함 속에 복음이 갇혀 있습니다.”


    4. 재림교인들은 진리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만난 재림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은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사랑했고, 기도에 진지했으며,
    자신의 삶을 헌신적으로 바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그분들의 순수함을 무시하거나 쉽게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순수함이 있었기에,
    재림교회의 교리가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말합니다:

    “그래, 재림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럼 당신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성경을 봐왔지만, 재림교회만큼 체계적으로, 일관성 있게 예언을 해석하는 곳은 없었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 변명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삶의 시간과 고민과 확신이 담긴 진심 어린 외침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말이 일면 옳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재림교회의 예언 해석은 매우 체계적입니다.
    그러나 체계적이라는 이유로 그것이 반드시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 구조가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복음, 무조건적인 은혜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체계는 아무리 정교해도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논리보다 사랑이며, 구조보다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나는 계속 이 글들을 씁니다.

    이 비평들은 사랑 없이 쓸 수 없는 글입니다.
    그분들을 향한 조롱이나 논쟁의 욕망으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글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재림교회 형제자매 여러분,
    계시록은 심판의 책이 아니라 사랑의 책입니다.
    안식일은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짐승의 표는 외부 강제보다, 십자가를 거절하는 자기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인은 조건의 인이 아니라, 사랑의 인침입니다.”


    저는 그분들께 하나님이 얼마나 더 아름다우신 분인지,
    계시록이 얼마나 더 따뜻하고 복음적인 책인지,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그분들이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을 사랑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될 때,
    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6. 성령이여, 복음을 다시 보게 하소서

    저는 기도합니다.

    성령이 나의 눈을 열어
    계시록 안에서도, 다니엘서 안에서도, 율법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확신 없는 신앙에서
    은혜 안에 쉬는 확신의 복음으로 옮겨가게 하소서.

    율법의 무게에서
    사랑의 기쁨으로 해방되게 하소서.

    그리고 그 여정을,
    사랑하는 재림교회 형제자매들과 함께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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