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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낙심(십자가)과 대실망(조사심판)의 거룩한 병행ㅡ신 선생님의 주장


1. “예수께서 초림하셔서 이 세상에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그분의 사역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윗의 왕위를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키시며 예루살렘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실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제자들은 깊은 절망과 낙담에 빠졌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들의 모든 소망이 사라졌다는 증거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실망했던 이유는 그들의 기대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망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은 성취되었고, 약속은 이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오해로 말미암아 그들은 실망했던 것입니다.”

2. “1844년 10월 22일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 실망과 좌절에 빠졌다.”

“제자들이 메시아의 사명을 정치적 해방으로 오해했던 것처럼, 재림운동의 성도들도 예언의 성취를 지상 재림으로 잘못 이해하였다.”

3. “그러나 그 오해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었으며, 그 실망은 새로운 진리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고, 이전보다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다.”

“재림운동을 경험한 성도들 역시 성소 진리와 예언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재림기별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다.”

4. “다니엘 8:14의 예언의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예언은 정확하였고 그 예언의 시간도 정확하였습니다. 실망은 사람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 예언의 실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해에서 비롯된 실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과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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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오해된 진리였고, 대실망은 진리로 오해된 실망이었다


1. 서론: 오해라고 다 같은 오해가 아니다
 
신 선생님은 대실망 사건(1844년 재림 예언 실패)을 제자들의 절망(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병치하며, 모두 사람의 오해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기준으로 보면, 이 둘을 같은 ‘오해’로 묶어 설명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과 1844년이라는 인간의 신학적 실패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차이를 흐리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중심 사건이며, 사랑의 자기희생입니다. 반면 대실망은 사건이 없었던 날, 인간의 계산 착오와 종말 강박이 낳은 신학적 실패였습니다. 그럼에도 신 선생님은 그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가 오해였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고 포장합니다.
 
그러나 질문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오해된 진리였지만, 대실망은 진리로 오해된 실망이 아니었는가?"
 
복음은 ‘사람이 실망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로 평가됩니다. 실망을 정당화하려는 해석은 복음의 중심을 흔들 수 있습니다.


2. 복음은 실망의 정당화가 아니라, 실망의 극복이다

신 선생님은 예수님의 초림을 오해했던 제자들의 실망과 1844년 대실망 사건을 병치하면서,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발생한 ‘오해’였다고 설명합니다. 겉보기에는 유사한 구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비교는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모호한 병치일 뿐입니다.

제자들의 실망은 실재한 사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절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오해했지만, 예수님은 그 오해와 절망을 사랑으로 껴안고 부활로 돌파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오해를 구속사로 끌어안아 주신 것입니다.

반면 1844년 대실망은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예언한 적도, 하나님이 구체적인 날짜로 약속하신 적이 없는 사건, 곧 예수님의 지상 재림이 바로 그날 일어날 것이라 스스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한 이들은 오히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 즉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서 지성소로 이동하셨다”는 개념을 창출해냈습니다. 그리고 이 가설 위에 새로운 해석들을 쌓고, 교리적 구조를 만들었으며, 마침내 하나의 교단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절망은 실제 사건에 대한 오해였고, 대실망은 허구를 사실로 착각한 오해였습니다. 한쪽은 진리의 사랑이 절망을 껴안았지만, 다른 한쪽은 인간의 실망을 이론으로 포장하며 위로하려 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후자는 사람이 꾸며낸 일이었습니다.

복음은 실패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실패를 직면하게 하고, 그 실패를 꿰뚫고 들어오신 사랑으로 우리를 새 생명으로 이끄는 힘입니다. 


3. “하나님은 사람의 실패도 사용하신다”는 말의 복음적 기준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도 사용하신다.”


이 말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어떤 실패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에 대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회개의 통로로,

*요셉의 고난을 구원의 길로,

*십자가의 절망을 사랑의 승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한 해석입니다. 자기의 실패를 십자가에 가져가고, 죽음과 부활의 패턴 속에 놓을 때만 그것은 복음의 일부가 됩니다.

반면, 1844년 대실망은 그 실패를 십자가로 가져가 회개하지 않았고, 해석의 전환을 통해 실패를 교리로 전환했습니다. 다시 말해, 실패의 회개 대신 실패의 정당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복음은 실패를 숨기지 않고 십자가에 드러냅니다. 그러나 신 선생님은 실패를 교리적 언어로 감추고, 새로운 신학 시스템(조사심판 교리)을 만들어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빛 아래 서야 할 지점입니다.


4. ‘십자가의 절망’과 ‘대실망’의 비교: 표면적 유사성, 본질적 차이
 
신 선생님은 제자들의 절망(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1844년 대실망을 병렬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비교는 표면적으로는 유사할지 몰라도, 복음의 본질을 결정짓는 차이점을 간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속사의 중심이며,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죄를 짊어진 자기희생의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 절망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안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절망은 하나님의 사랑이 감추어진 절정이며,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입니다.
 
반면 1844년의 대실망은 예수님의 어떤 실재적 행동이나 구속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 계산과 종말 시나리오에 대한 해석이 빗나간 결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벌어진 해석 실패인 것이지, 십자가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적 자기계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사건입니다.
 
*결정적 차이: 십자가는 사랑이 계시된 실재였고, 대실망은 사랑이 부재한 해석이었다.
 
만일 이 두 사건을 같은 선상에 놓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인 십자가를 인간의 신학적 창작물인 조사심판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절망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향한 신앙 여정 속에서 잠시 겪는 이해의 지체였지만, 대실망은 성경이 계시한 복음보다 인간의 시간 계산을 앞세운 잘못된 해석의 산물이었습니다.


5. “그 실망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가?

신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오해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었으며, 그 실망은 새로운 진리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진심어린 해석일 수 있으나, 위험한 신학적 일반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인간의 실수를 선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오해를 “진리의 발견 과정”으로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오해는 십자가 앞에서 무너졌고, 그들은 회개하고 새로운 복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1844년 대실망 이후의 전개는 회개보다는 교리 수정을 통해 해석을 보존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의 절망을 ‘생명의 복음’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대실망은 하늘 성소와 예언 연대에 대한 새로운 이론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복음의 십자가 대신 조사심판이라는 “교리 중심 구조”로 대체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진입니까? 아니면 해석의 퇴행입니까?


6. “제자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성취된 예언을 몰라 실망했다.”

이 논리는 다음 주장을 전제합니다:

(1)제자들은 오해했다.
(2)그러나 예언은 성취되었다.
(3)그들은 오해했기에 실망했지, 하나님의 계획은 정확했다.
(4)마찬가지로 1844년 예언도 성취되었고, 사람들만 오해했을 뿐이다.

이 주장의 심각한 문제는 “예언의 실재적 성취”와 “오해의 결과”를 구별하지 못한 채 병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실제로 성취된 예언입니다. 구약에서 수천 년 간 기다린 메시야가 오셨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방식을 오해했습니다. 여기서 “오해”는 사건의 실재성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844년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은 사건을 실재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는 “성취된 예언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성취된 예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십자가라는 실재된 사건을 해석하지 못해 실망했고,

재림운동은 실재하지 않은 사건을 존재한다고 믿어 실망했습니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7. 결론: 진리의 십자가인가, 오류의 위장인가?

우리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실망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그 어떤 실망도 정직하게 직면하되, 그 위에 십자가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오해한 제자들은 부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했지만, 대실망 이후 교단의 선조라는 사람들은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실패를 십자가로 가져가는 사람은 복음의 길을 따르지만, 실패를 이론으로 감추는 사람은 자기 의의 길을 따릅니다.

복음은 실패를 감추지 않습니다. 복음은 실패를 드러내되, 그것을 십자가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인간의 오류를 덮어주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그 오류의 깊은 상처 속으로 들어와 새 생명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844년 대실망은 회개의 기회였어야 했습니다.

그날은 사람들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어야 했고, 재림의 날짜가 아니라 십자가의 심장을 다시 만나는 날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날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대신, 지성소와 예언 해석이라는 인본적 구조물이 복음을 대체하기 시작한 날로 변질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날,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때에 오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날은 이미 갈보리 언덕에서 임했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만 실패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절망조차 생명의 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아닌 구조물 위에 교리를 세우고, 오류를 신학으로 포장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보가 아니라 복음의 왜곡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복음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사람의 실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사람의 계산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해석을 교리로 승격시키지 않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이 실패를 껴안고, 죽음을 통과하여 생명을 낳는 사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높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1844년을 통해 교리를 정당화하지 말고, 오직 갈보리를 통해 진리를 증언하라.”

“오해를 섭리로 포장하지 말고, 십자가를 복음의 유일한 해석 키로 삼으라.”

“하늘 성소보다, 먼저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라.”


그날의 실망도, 오늘의 회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회개의 자리는 교단의 정체성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여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오해를 넘어서 진리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십자가 앞에 서서 다시 묻습니다.
복음을 따르겠는가, 교리를 지키겠는가?
  • ?
    벚꽃향기 2025.06.13 15:0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1844년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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