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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버린 신만이 모든 종교를 품는다>
― ‘종교다원주의’ 강의에 대한 복음 중심 비평 편지 ―


먼저, 선생님의 오랜 학문적 여정과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강조하신 강의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것과 같다〉는, 폐쇄적 근본주의로 인해 상처 입은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을 통해, 그 해방감의 실체가 ‘복음으로부터의 해방’이었는지, 아니면 ‘복음 안에서의 참 자유’였는지를 묻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세계 종교 간의 평등한 시각, 곧 “모든 종교는 궁극적 진리를 향한 다양한 길이다”라는 주장은 자비롭고 지성적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주장이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망각한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조심스럽게 지적드리고 싶습니다.


1. 진리의 상대화인가, 진리의 자기포기인가?

선생님께서는 강의에서 “절대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모든 종교는 그 진리의 다양한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결여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란 어떤 사상 체계나 교리 체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는 선언은, 교리적 독단이 아니라, 자기를 죽임으로 세상을 살리는 사랑의 진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진리는 사물처럼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상대화'하는 것이 참된 겸손은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우리가 진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되, 그 진리가 스스로 우리를 향해 걸어오셨다는 복음의 감격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절대 진리에 도달한 종교가 아닙니다.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십자가에서 자신을 낮추시고 다가오신 사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의 계시이며, 그 어떤 인간의 종교적 사색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Kenosis)입니다. 만약 이 진리가 그저 다른 종교의 길들과 대등한 하나의 표현에 불과하다면, 왜 하나님은 죽음을 감수하시며 자신을 계시하셔야만 했는가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2. 구원의 다양성인가, 사랑의 무력화인가?

선생님은 종교 간 구원관의 차이를 단지 ‘문화적 차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사랑이 구원의 본질이라면, 구원이 그렇게 다양하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방식으로 흩어져도 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사람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고 하셨을 때, 그것은 종교적 배타성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기에, 다른 길이 없다는 절규였습니다.


십자가는 배타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길이 실패했음을 하나님 스스로가 끌어안으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말합니다. 다른 종교를 아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아시고, 품으셨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복음은 종교의 길을 안내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어떤 종교의 길도 하나님께 이르지 못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길이 되어 오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고, 십자가를 지는 좁은 길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 길에 응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종교 이름을 논하기보다, 그 길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왜 ‘모든 종교는 같다’는 말이 가장 무서운 폭력인가?

선생님의 주장은 매우 인도적이며, 인류의 지혜를 존중하려는 태도처럼 보입니다. 모든 종교는 동일한 산을 다른 길로 오르는 것과 같고, 어느 길이든 그 정상은 결국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 비유는 그럴듯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등반해서 도달할 수 있는 '산 위의 신'이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오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모든 종교를 같다고 말하는 순간, 그 종교들의 고유한 고통, 고백, 계시, 절규, 역사성은 지워집니다. 이슬람이 말하는 알라, 힌두교가 말하는 브라흐만, 불교가 말하는 열반, 기독교가 말하는 성부 하나님은 결코 단순히 ‘같은 산의 정상’이 아닙니다. 이들을 모두 ‘같은 것’이라고 묶는 순간, 우리는 모든 종교가 자신을 던져 지켜낸 고유한 진리의 불꽃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인간이 열심히 수행해서 닿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 된 인류를 위해 스스로 무너지고 찢기신 사랑의 자기포기입니다.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는다면, 그 복음의 자기희생은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게 됩니까? 십자가는 ‘모든 종교가 결국 같다’는 말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요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나의 생명을 너희에게 내어주었거늘, 그 사랑을 모든 종교 속의 지혜와 동등하게 보겠느냐?”


복음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걸고 외치는 유일성입니다. 유일해야만 할 만큼 깊은 사랑.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한 사랑. 그래서 오히려 그 유일성은 타인을 배척하는 무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무장 해제의 초청이 됩니다.


4. 진정한 다원주의는 복음을 품은 십자가다

선생님, 복음은 타 종교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불교의 자비를, 힌두의 경건을, 유교의 인(仁)을, 심지어 이슬람의 순복까지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가기 위한 길’이었다면, 하나님은 그 길을 포기하시고 사람에게로 내려오셨다고.

이것이 복음의 다원주의입니다. 복음은 복음만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자신마저도 찢어서 타인을 섬기는 ‘십자가적 다원주의’입니다. 배타성을 넘어선, 그러나 아무거나 받아들이는 상대성도 아닌, 자신을 버리기까지 타인을 껴안는 십자가적 환대의 중심성입니다.

오 선생님의 강의가 진정으로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면, 그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는, 어느 종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종교’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요구하셨고, 그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분은 어떤 종교도 선택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종교를 뚫고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앞에서, ‘어느 종교를 믿느냐’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나는 응답하고 있는가?”


5. 복음은 모든 종교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성취합니다

선생님은 각 종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른 종교들을 “부정”하거나 “짓밟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각 시대, 각 민족, 각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과 조우해 오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레오바고에서 헬라 철학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행전 17:23)


바울은 그들의 사상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상들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밝혔습니다. 십자가는 이 모든 인류의 종교적 갈망과 사유를 완성시키는 사건입니다. 고대의 제사, 윤리, 명상, 예식, 계율, 영혼의 갈망… 그것들은 모두 불완전했지만, 복음 안에서 그 의미가 열립니다.

불교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고, 힌두교는 존재의 근원과의 합일을 추구했으며, 유교는 덕과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갈망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응답받았습니다.

복음은 다른 종교를 경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종교 안에 깃든 인간의 갈망을 존중하면서, 그 중심을 향해 다가가 “진짜 생명은 여기 있다”고 초대합니다.


6. 십자가의 스캔들: 어느 종교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수양, 마음의 고요, 공동체적 덕성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차원을 넘어선 ‘스캔들’입니다. 십자가는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비종교적인, 너무나 수치스럽고, 너무나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모욕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신화도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사건은 그 누구도 자랑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기독교조차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 앞에서 모든 사람, 모든 종교, 모든 지식은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어떤 자격자에게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모든 자격을 잃은 자들에게 흘러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철학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이며, 종교가 따라 할 수 없는 겸손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달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고 무너뜨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어느 종교에서도 듣지 못한 ‘사랑의 진리’입니다.


7. 어느 종교도 모른다는 것의 참된 의미

선생님의 말처럼,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어느 종교도 참되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단순히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노력, 도덕적 향상, 지식의 오만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무릎 꿇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릎 꿇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같은 위치에 서 있습니다.
불자도, 회교도도, 유교도도, 무신론자도,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차별이 아닙니다. 배타성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류 모두를 위한 가장 낮은 문, 가장 깊은 품, 가장 넓은 사랑입니다.
그 누구도 자랑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억지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에 이끌려 초청받을 뿐입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 모두,
다시 처음처럼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의 지적 성찰과 깊은 인문학적 고민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종교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로,
가장 멀어진 자를 위해,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가장 깊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압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오늘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를 넘어 ‘하나님의 품’으로 이끄는 생명의 불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
    벚꽃향기 2025.07.14 01:31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는, 어느 종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어느 종교도 참되게 알 수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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